고조선은 기원전 약 2333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쳐 있었던 고대 국가입니다. 이는 고대 조선 또는 단군 조선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고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건국자는 단군왕검으로,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근처에 신시(神市, 신들의 도시)를 세웠고, 그곳에서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길 원하여 각각 인간의 모습을 얻는 시험을 거쳤습니다. 곰은 성공하여 환웅의 아내가 되고, 그녀는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증거에 기반한 고조선의 기록은 중국 측 사료인 《산해경》, 《한서》, 《사기》 등에 언급되어 있으며, 이들은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의 여러 부족 연합체였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고조선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 세력을 통합하면서 발전했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한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이르면,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지배했고, 중국의 전국 시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도읍을 아사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압력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고조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만 조선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기원전 108년, 위만 조선이 한(漢) 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고조선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고학적 발견과 중국 측 사료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한국에서는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기원을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와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 108년까지 존재했던 고대 국가입니다. 현재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단군왕검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건국 신화에 해당하며, 한민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단교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같은 고대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고조선의 정확한 국경, 정치 체계, 사회 구조 등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고대 중국의 사서인 『산해경』과 『주역』에도 고조선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 통치 영역이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랴오둥반도까지 뻗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漢) 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며, 이후 해당 지역에는 한나라의 사신 지역이 설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조선이 있던 지역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나중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기간을 한국사에서는 종종 "삼한시대"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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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2023.12.06
- 선덕여왕 2023.11.08
- 이순신장군 2023.10.30
- 원기둥과 원뿔 2023.10.30
- 회전체 2023.10.26
- 다면체 & 정다면체 2023.10.26
- 울산 파리안병영성, 고즈넉한 한옥 카페에서 힐링을 2023.10.09
- 단군왕검 2023.10.06
- 어린이날 2023.05.08
- 정다면체 2023.04.11
- 신사임당 2023.03.02
- 장영실 2023.02.13 1
- 세종 2023.01.26
- 대각선 2023.01.11
- 강감찬 2023.01.09
- 티라노사우루스 2023.01.08
- 한글 2023.01.08
- 역사 2023.01.08
- 설날 2023.01.08
- 센텀 신세계 카페 키츠네 2023.01.07
고조선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신라의 27대 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덕만입니다.
가문은 신라의 김 씨 왕조입니다. 김 씨는 신라의 왕족이자 귀족 가문으로, 신라의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후손입니다. 김 씨는 신라의 왕을 배출한 가문으로, 신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등극한 여성 국왕이자 동아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다스린 여성 국왕입니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632년(선덕여왕 1년)에서 647년(선덕여왕 15년)까지로, 15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습니다.
선덕여왕은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며 신라의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첨성대, 황룡사 9층 목탑, 안압지 등 많은 문화재를 세우거나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중국의 첨단 문화와 기술을 수입, 보살핌으로써 신라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녀의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채택되어 신라 사회의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으며, 이는 신라의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은 또한 국내외의 불교 성지를 창건하거나 복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선덕여왕의 통치는 신라의 통일, 문화 발전, 그리고 국제적 위상 향상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녀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를 통해 외교적인 능력을 보여주었고,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1. 외교: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외교적인 관계를 능숙하게 조정하였습니다. 백제를 공격하여 지배력을 확장하였고, 고구려와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2. 문화 발전: 선덕여왕은 신라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녀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신라의 문화와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첨성대를 포함한 많은 문화유적을 건립하였습니다.
3. 국토확장: 선덕여왕은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녀의 통치하에 신라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통치 방식은 일부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백제 공격은 백제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고구려와의 관계 역시 긴장감을 높였습니다. 또한,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것은 신라 내에서 일부 반발을 촉발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덕여왕의 업적은 신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외교, 문화 발전, 국토확장 등의 성과는 신라 역사를 빛내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선덕여왕의 가족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는 신라의 24대 국왕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딸인 김성만으로 선화왕후입니다. 선덕여왕의 기록에서는 형제자매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선덕여왕은 적토왕과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친척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의 가족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진평왕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평왕은 신라의 28대 왕으로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었고,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로서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선덕여왕의 어머니 역시 그녀의 통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선덕여왕의 어머니는 김성만의 딸로, 김 씨 성을 가진 신라의 귀족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선덕여왕은 어린 시절부터 귀족사회의 영향력과 문화를 체득하며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나중에 왕위에 오르고 신라를 통치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덕여왕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어서 그 외의 가족 구성원이나 세부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선덕여왕이 국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뛰어난 지도력과 김 씨 집안의 기반이 결합한 결과입니다.
그녀의 가족 배경은 신라 귀족 사회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어머니 쪽 가족인 김유신은 신라의 통일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가족적 지원과 더불어 선덕여왕 자신의 뛰어난 지도력과 통치 능력이 그녀를 국왕으로 만들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또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신라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엄격한 계급제도를 가진 사회였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제도를 뛰어넘어 여성이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라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순신장군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 중기의 위대한 해상 전략가이자 장군으로, 그의 훌륭한 지휘력과 전략으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그는 조선의 해군을 이끌고 일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 속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죠.
이순신 장군은 1545년에 출생하여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무예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어른이 되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여 조선의 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풍부한 학문과 뛰어난 무예 능력은 그를 빠르게 승진시켰지만, 그는 정치적 권력 싸움 때문에 여러 번 불공평하게 낮은 직위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고, 그의 능력과 충성심은 결국 그를 전설적인 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의 해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그의 뛰어난 전략과 지휘력은 우리나라를 큰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의 용감함과 헌신적인 정신은 후세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임진왜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일본군은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많은 병사와 배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 병사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병사와 배가 많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은 용감하게 싸워서, 결국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조선시대의 특별한 전함입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은 거북의 등껍질처럼 생긴 모습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었어요.
거북선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져서 적의 공격에 잘 견디고, 위에서는 화살이나 총알이 통하지 않도록 철로 덮여 있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거북선은 적의 공격을 잘 차단하고, 안전하게 적에게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북선은 앞부분에는 용의 머리를 닮은 모양이 있어서 적에게 위협을 주는 역할을 했고, 이 용의 머리에서는 연기와 불을 뿜어내어 적선을 혼란에 빠뜨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발명으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용해서 적의 수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고, 그의 전략적 사고와 발명은 오늘날에도 많이 기억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전투는 '명량해전'입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단지 13척의 전함으로 일본의 133척의 전함을 이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전략과 지휘력, 그리고 조선 해군 병사들의 용기 덕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 했고, 그의 마지막 숨결도 나라를 위해 쓰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했고, 이는 그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활동한 시기는 주로 선조와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시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1545년에 태어나서 1598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 조선의 왕은 명종, 선조, 그리고 광해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선조와 광해군이 왕이었던 시기로,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598년까지는 선조와 광해군이 교대로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사회와 정치가 많은 변동을 겪었던 시기로, 외적인 침략과 내적인 혼란이 복합적으로 어려움을 초래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그의 용감한 투쟁과 뛰어난 지휘력은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중기로, 많은 변동과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생애 대부분은 세조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잦은 외부 침략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용감함, 충성심, 헌신적인 정신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이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계속 기억되고 있습니다.
원기둥과 원뿔
원기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콜라를 마실 때 사용하는 빨대를 생각해 보세요. 빨대의 모양이 바로 원기둥이랍니다. 빨대의 양 끝이 원이고, 그 사이를 잇는 부분이 직선이죠.
원기둥은 양 끝이 원이고, 그 사이를 잇는 부분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입니다. 원기둥의 아래와 위에 있는 원들은 정확히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원들을 '기저'라고 부르며, 이 두 원이 서로 평행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기둥의 이름에 '기'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죠.
원기둥의 높이는 원기둥이 얼마나 '긴' 도형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빨대를 생각해 보면, 긴 빨대는 높이가 높은 원기둥이고, 짧은 빨대는 높이가 낮은 원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원기둥의 부피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기둥의 부피를 구하는 공식은 '원의 넓이 x 높이'입니다. 원의 넓이는 반지름의 제곱에 원주율(약 3.14)을 곱한 것이고, 이것을 원기둥의 높이와 곱하면 원기둥의 부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원기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인 기하학을 배우는 데 중요한 단계입니다. 원기둥을 이해하면, 그 이후에 더 복잡한 도형들, 예를 들어 원뿔이나 구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또한 실생활에서도 원기둥 모양의 물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원기둥에 대해 알아두면 실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원뿔이라는 도형을 떠올려 보세요. 아이스크림콘 같은 모양이 생각나나요? 바로 그것이 원뿔입니다.
원뿔은 바닥 면이 원이고, 그 원에서 위로 올라가며 점점 좁아져서 꼭대기에서 만나는 모양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꼭대기에서 만나는 점을 '꼭짓점'이라고 부르고, 바닥 면의 원에서 꼭짓점까지의 거리를 '높이'라고 부릅니다.
원뿔을 그리거나 만들 때는, 먼저 원을 그린 다음 그 원의 중심에서 위로 선을 그어서 꼭짓점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의 가장자리에서 꼭짓점까지 선을 그어서 원뿔의 모양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원뿔의 부피는 어떻게 구할까요? 원뿔의 부피를 구하는 공식은 '원의 넓이 x 높이 / 3'입니다. 원의 넓이는 반지름의 제곱에 원주율(약 3.14)을 곱한 것이고, 이것을 원뿔의 높이와 곱한 다음에 3으로 나누면 원뿔의 부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원뿔에 대한 이해는 기하학을 배우는 데 중요한 단계입니다. 원뿔을 이해하면, 그 이후에 더 복잡한 도형들, 예를 들어 구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또한 실생활에서도 원뿔 모양의 물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원뿔에 대해 알아두면 실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원기둥과 원뿔은 모두 원을 기반으로 한 3차원 도형입니다. 하지만 두 도형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어요.
원기둥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닥면과 윗면이 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두 원 사이를 직선으로 이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원은 서로 같은 크기이며, 원기둥의 높이는 이 두 원 사이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빨대나 통조림은 일반적으로 원기둥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원뿔은 바닥면이 원이고, 이 원에서 위로 올라가며 점점 좁아져서 꼭짓점(또는 꼭대기)에서 만나는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스크림의 콘처럼 생겼습니다. 원뿔의 높이는 바닥면의 원 중심부터 꼭짓점까지의 거리를 말합니다.
원기둥과 원뿔의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면, 각 도형의 특성과 사용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회전체
회전체는 평면도형을 한 직선을 축으로 하여 1회전 시킬 때 생기는 입체도형입니다.
직사각형, 직각삼각형, 반원을 한 직선을 축으로 하여 1회전 시킬 때 생기는 회전체는 각각 원기둥, 원뿔, 구가됩니다.
'구'와 같은 경우는 그 어느 방향으로 잘라도 나오는 단면은 항상 원이 됩니다. 그리고 구, 원기둥, 원뿔, 원뿔대의 공통점이라면 각 회전체를 회전축에 수직인 평면으로 자른 단면은 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원기둥을 회전축을 포함한 면으로 자르면 직사각형이 나오고, 원뿔을 회전축을 포함한 면으로 자르면 삼각형이 나오고, 원뿔대를 회전축을 포함한 면으로 자르면 사다리꼴이 나옵니다. 구는 어느 방향으로 자르던 무조건 원이 나옵니다.
회전체
① 회전축 : 회전시킬 때 축이 되는 직선
② 모선 : 회전체에서 옆면을 만드는 선분
원뿔대
원뿔을 밑면에 평행한 평면으로 자를 때 생기는 입체도형 중에서 원뿔이 아닌 것
① 밑면 : 평행한 두 면
② 옆면 : 모선이 회전하여 생기는 면
③ 높이 : 두 밑면 사이의 거리
다면체 & 정다면체
평면 다각형들을 면으로 가지고 있는 입체도형으로 평면 위에 있지 않은 도형입니다.
기하학에서 다면체는 보통 틈이 없이 다각형의 변을 붙인 여러 개의 다각형을 조합한 3차원 입체를 말합니다. 다면체는 볼록 다면체와 오목 다면체로 분류합니다.
현대 수학에서 아직 상식적으로 다면체로 받아들여지는 대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엄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클리드부터 시작해서 요하네스 케플러, 푸앵소, 코시 등 시도한 수학자들은 많은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행히도 직관적으로만 이해하면 됩니다.
다면체는 이들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도형이다.
0차원: 꼭짓점은 변이 끝나는 점이다.
1차원: 변 또는 모서리는 꼭짓점과 꼭짓점을 연결하는 선이며, 면과 면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2차원: 면은 변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체로 다각형이라는 평면 도형의 형태를 취한다.
3차원: 포(cell) 혹은 내부(body)는 면들로 둘러싸인 안쪽 부분을 말한다.
모든 변이 같은 정다각형이고, 꼭짓점에 같은 수의 다각형이 모이는 다면체를 정다면체라고 합니다. 정다각형이 무한히 많은 것과 대비되게 정다면체는 다섯밖에 없습니다.
반면, 일반적 다면체의 구조는 상상을 초월하도록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사면체는 각 면의 다각형 수를 보았을 때 한 가지 형태만 있지만 오면체부터는 두 개 이상이 있습니다. 육면체의 경우 사각형 6개로 이루어진 육면체, 오각뿔, 삼각쌍뿔의 세 종류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면의 수를 늘리다 보면 매우 다양한 다면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면체를 임의의 차원으로 확장한 폴리토프(Polytope)는 'n 차원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오로지 (n-1) 차원 공간의 면으로만 이루어진 도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다면체
기하학에 등장하는 3차원 도형의 일종입니다.
정다면체는 모든 면이 서로 합동인 정다각형이고 각 꼭짓점에 모이는 면의 개수가 같은 다면체를 말합니다.
정다면체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5가지가 일상적인 정다면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다면체라고 말하는 볼록 정다면체 5종과 일상적으로는 정다면체라고 부르지 않는 오목 정다면체 4종까지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다면체는 모두 9개입니다. 예로부터 정다면체는 다섯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정의에서 사용하는 면을 오목정다각형까지 확장했고, 두 개를 정다면체의 개념에 추가하였습니다. 이후 푸앵소는 이 정의에서 한 꼭짓점에서 만나는 면의 개수를 분수번까지 확장해 케플러가 만든 다면체의 쌍대에 해당하는 두 개의 다면체를 찾아내었습니다.
울산 파리안병영성, 고즈넉한 한옥 카페에서 힐링을
안녕하세요. 오늘은 울산의 숨겨진 보석 같은 카페, 파리안병영성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병영성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한옥 카페 파리안병영성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에서 편안한 휴식을 선사합니다.

넓은 정원과 아늑한 실내 공간
파리안병영성은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어 따뜻한 햇살 아래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또한,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실내 공간은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 넓은 주차장: 편리한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다양한 공간: 1층, 2층, 별관 등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취향에 따라 자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야외 정원: 넓은 야외 정원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
파리안병영성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와 차,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를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전통차는 한옥 카페의 분위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족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곳
파리안병영성은 넓은 공간과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곳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거나,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습니다.
울산 파리안병영성, 꼭 한번 방문해 보세요
울산에서 특별한 카페를 찾고 계신다면, 파리안병영성을 추천합니다. 아름다운 한옥 건물과 넓은 정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힐링을 경험해 보세요.
* 주소: 울산 중구 병영로 92
* 영업시간: 매일 10:00 - 22:20
* 전화번호: 052-222-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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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 조의 기록에 따르면, 하늘의 주재자인 환인의 손자이자 환웅과 웅녀의 아들로 초기국가 시대 고조선을 세운 사람으로 고조선의 제1대 왕입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333년부터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린 후 중국 주나라의 기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물러나 은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의 의미나 해석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고 합니다. 기원전 2333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중국의 이상적 제왕이었던 요임금과 시대를 맞춘 것으로 봅니다.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것은 왕위를 1,500년 동안 세습했다는 의미로 봅니다. 단군 단군왕검, 단군 천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입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로 이해하여 평양에 사당을 짓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함께 모신 이후로 단군은 고조선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며 한민족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되었습니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 편(紀異篇)을 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비됩니다. 한편,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에 관한 문제를 논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먼저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 명(命) · 병(病) · 형(刑) · 선(善) ·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였는데 3 · 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것을 못 참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 : 중국의 성군인 三皇五帝 가운데 堯임금을 말함. 당시 고려의 3대 왕인 定宗의 이름이 堯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비슷한 의미인 高자로 대신 쓴 것임) 즉위 후 50년인 경인(庚寅: 당고의 즉위년은 戊辰이므로 50년은 丁巳요 경인이 아니니 틀린 듯함)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 弓 대신 方자로도 씀)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 나라 호왕(虎王: 주나라의 武王을 말함. 고려 2대 왕 惠宗의 이름 武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제왕운기』에서는 『본기(本紀)』(본기는 ‘단군본기’인 듯함)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서자인 웅(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 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鬼〕 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가 바로 단웅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조선 지역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시라(尸羅: 신라) · 고례(高禮: 고구려) · 남북(南北) 옥저(沃沮) · 동북(東北) 부여(扶餘) · 예(濊) ·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계이다. 1,03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함에 있어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로 단군을 기록하고 있고 『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각기 다르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후자로써 단군을 나타냅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나, 『제왕운기』에서는 전조 선(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에 의한 조선을 기술하고, 후조선(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에 의한 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위만조선과 함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한 종족 신화이던 것인데,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 시기가 위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합니다. 이는 앞서 『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는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단군과 관련하여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라는 견해가 전개되었습니다. 즉,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 ·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ᄇᆞᆰ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민족이 분포하는데, 종족적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일련의 관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백산(白山)은 그 중심이고 이 문화가 우리 역사에서 구체적 실체로 나타난 것이 단군과 부루(夫婁)라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도 제기되었습니다. 즉,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돌방〔石室〕내의 화상석(畵像石) 그림이 문헌에 보이는 단군 신화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내용은 북방계의 샤머니즘과 관련되며, 이들 특성은 종족 이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 견해의 근간이었던 무씨사당 화상석의 내용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단군신화에 관한 문헌 위주의 해석이 아닌 역사적 입장에서 결론을 내린 견해도 있습니다. 즉, 이 신화가 삼신 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이라는 두 계통의 신화가 혼재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 · 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이들 두 종족의 시조 신화가 혼재된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의 일부 족적 시조 설화였던 것인데 삼국통일과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한민족의 시조 신화로 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단군신화는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하였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이라고 보고,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적(祭主的) 의의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므로,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제시되었습니다.
단군신화를 단순한 신화나 토테미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견해는 원시 부족들의 원시 신앙에 관한 내용을 『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하여, 농경 관계 기사를 곡물 재배 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며,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합니다.
단군신화의 신화 자체에 나타난 사회상을 강조하고, 또 이를 신봉한 집단이 어떠한 사회집단이었는가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계보가 한족(漢族)의 기자 전설이 개입되어 혼란이 있음을 지적하고,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에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종래의 기자조선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여러 견해를 감안할 때 단군신화에 대한 이해는 문헌과 고고학적 방법을 연결해 분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즉,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가 과연 고고학적으로 어떠한 문화를 내포한 시대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한편,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웅녀의 존재는 곰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중심이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신화 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과 연결해 고려할 때 고 아시아족(古亞細亞族, Paleo Asiatic)의 존재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들의 시조 신화에는 곰 숭배 사상이 나타나며 그들은 자신들이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고 아시아족이 곰 숭배와 함께 갖고 있는 샤머니즘에서 종교적 요소와 단군신화를 비교해 보면,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신화의 ‘단군’,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 관념과 단군신화의 신단수 등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 아시아족과 연결해 파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 아시아족이라는 사실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변화한 것이 종족과 문화 변화의 결과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종족이 알타이 계통의 예맥족이며, 그 출현 시기는 이른바 기자조선으로의 변화 시기와 부합한다는 것에서 그 전환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단군의 개국 연대가 중국의 요임금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 점은 더 연구를 해야 합니다. 최근 이 시기의 문제와 관련하여 요령(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 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문화와 우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단군신화를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첫째 단계에서는 씨족 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 토템이 생겼고, 둘째 단계에서는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 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이며, 셋째 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인데, 이에는 보다 철저한 검증이 요구됩니다.
또, 단군 관계 문헌에 대하여, 『삼국유사』를 불가(佛家) 계통의 사서로, 『제왕운기』 등은 유가(儒家) 계통의 사서로, 『규원사화(揆園史話)』 ·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을 도가(道家) 계통의 사서로 보아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단군의 민족사적 의의는 역대 단군 인식의 변화를 시기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해 보기도 합니다. 제1단계는 고조선 당시의 단군 인식으로, 고조선 시조신으로서의 단군이며, 제2단계는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고려 중엽(13세기)까지로, 단군을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지역 신으로 인식되던 시기라고 합니다. 제3단계는 고려 중엽에서 한 말(20세기 초)까지이며, 이 시기는 단군이 한국의 국조, 즉 나라를 처음 있게 한 시조로 숭배되던 시기이며, 제4단계는 한말부터 현재까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인식되는 시기라고 봅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합니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 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이 단합하는 구심체 구실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입니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다. 개천절은 이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으나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정식으로 개국에 관한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단기(檀紀)는 고려 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 사용했으며, 단기 원년을 서기전 2333년으로 보는 근거는, 조선시대의 사서인 『동국통감』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임금 즉위 25년 무진으로 본 것에 있습니다. 단기의 사용은 1962년 1월 1일부터 중지되고 서기로만 쓰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날
어린이날(영어: Children's Day)은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들이 밝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고,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지정한 날로 여러 나라에서 기념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날에는 특별히 부모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어린이가 평소에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 등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5월 5일이지만, 나라와 종교·문화권 등에 따라 기념일이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국제·세계 어린이날
국제 어린이날
여러 나라에서 국제 어린이날(International Children's Day)을 기념합니다. 이는 192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6월 1일에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곳은 보통 공산주의 국가였고, 서유럽 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다른 날에 어린이날을 기념했기 때문에 국제 어린이날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세계 어린이날
1954년부터 유엔과 유네스코는 11월 20일에 세계 어린이날(Universal Children's Day)을 기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국의 어린이날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어린이날은 6월 1일이며, 한자로 아동절(중국어 간체자: 儿童节, 정체자: 兒童節, 병음: èrtóngjié 얼통지에 [*])이라 합니다. 이 날에는 부모와 어린이들이 학교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하고, 상으로 공책, 연필 등을 시상한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어린이날(스페인어: Día del Niño디아 델 니뇨)은 8월의 두 번째 일요일이다. 1990년 이전까지는 어린이날이 8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었으나, 8월의 두 번째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이슬람을 깊이 믿는 나라들은 이슬람력으로 5월 5일인 7월 4일을 어린이날로 지낸다. 과거에 독립한 이슬람 국가들은 독립 직후부터 어린이날을 옮긴 나라들이 많습니다.
일본
일본도 5월 5일이 단고노셋쿠(端午の節句) 즉, 단오이자 어린이날 (일본어: こどもの日 고도모노히[*], 남자 어린이의 날)로서 공휴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외에 3월 3일은 히나마쓰리(ひなまつり)로 여자 어린이의 날이지만 공휴일은 아닙니다.
캐나다
캐나다의 어린이날(영어: National Child Day)은 매년 11월 20일로, 1993년에 국회 법안 C-371'어린이날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태국
태국의 어린이날(태국어: วันเด็กแห่งชาติ)은 매년 1월 두 번째 토요일로, 총리가 보통 각각의 어린이날의 모토로 성명을 발표합니다.
대한민국
어린이의 인권을 위한 날
대한민국의 어린이날은 어른으로부터 '아이들, 애, 애들, 계집애' 등으로 불리던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하면서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정한 날이다. 1919년의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진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1년에는 방정환, 김기전 등에 의해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되었고, 천도교소년회가 1922년 5월 1일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경성 시내에서 '어린이의 날' 가두 선전을 한 것이 어린이날의 역사적 기원이다. 이듬해인 1923년 4월 17일에는 천도교소년회 주도로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 각 소년운동 단체들이 참여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이 조선소년운동협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공식 채택하여 매년 행사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1923년 5월 1일은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최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개최하기 시작한 제1회 어린이날이다. 한국의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이 발표된 것도 이때다. 1923년 방정환(方定煥)을 포함한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고 5월 1일은 노동절하고 겹쳐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많이 받아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8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에 행사를 진행했다.([천도교약사] 284쪽 참조) 일제의 탄압이 있던 시기인 1938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1946년 5월 5일에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이후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어린이를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합니다.
— 1981년에 개정된 아동복지법 조문
아동복지법 제6조(어린이날 및 어린이 주간)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높임으로써 이들을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하며,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를 어린이주간으로 합니다.
— 아동복지법 참조
대한민국의 대체공휴일
2014년부터는 어린이날이 토요일이나 다른 공휴일(일요일 포함)과 겹칠 경우, 그다음 비공휴일을 대체휴일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2013년 10월 29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2014년부터 대체공휴일 적용 대상이 되었고, 2018년부터 첫 적용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어린이날 다음 날(5월 6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조금 더 긴 연휴를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 2016년 어린이날과 공휴일 사이 평일을(2016년 5월 6일) 정부에서 임시 공휴일로 지정한 것에 대한 실효성 논쟁이 있었다. 공휴일의 혜택이 대체공휴일 적용 사업장인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정규직), 무기계약직, 기간제 노동자들에게 적용되지만, 민간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적용을 받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단, 민간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고 해도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합의가 있다면, 대체공휴일이 적용된다.
정다면체
플라톤의 다면체는 고대부터 알려져 왔다. 플라톤이 살던 시기보다 최소 1000년 전의 스코틀랜드의 후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돌로 조각된 공들에서 정다각형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다면체의 전조인 주사위의 유래는 문명의 발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플라톤의 다면체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몇몇 자료들은 플라톤의 다면체 발견이 피타고라스의 업적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다른 자료들은 피타고라스가 오직 4면체, 6면체, 12면체에만 정통했고, 8면체와 20면체의 발견은 플라톤과 동시대의 사람인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의 공이라고 암시한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는 5개의 정다면체에 대한 수학적인 묘사를 제공했고, 그 외의 다른 정다면체는 없다는 최초의 알려진 증명을 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플라톤의 다면체들은 특히 그의 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라톤은 이들 다면체에 대해 티마이오스(Timaeus c.260 B.C.)에 기술하면서 각각을 고전적인 4 원소에 대응시켰다(흙, 공기, 물, 그리고 불).
흙은 6면체와 공기는 8면체와 물은 20면체와 불은 4면체와 대응시켰다. 이러한 대응은 매우 직관적으로 정당화되는데, 예를 들면, 불이 내뿜은 열기가 매우 날카롭고 찌를 듯하기 때문에 4면체에 대응시켰고, 물은 작은 공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손으로 들어 올리려 하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20면체로 표현했다. 반면에, 구형처럼 보이지 않는 6면체는 흙을 나타냈다. 더욱이 흙의 단단함은 유클리드 공간을 모자이크식으로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정다면체가 6면체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졌다. 5번째 플라톤의 다면체인 정 12면체에 대해 플라톤은 모호하게 "천국의 별자리들을 정렬시킨다..."라고 언급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5번째 원소에 대해 "ether"라고 언급하면서 천국이 이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했지만, 이를 플라톤의 다면체와 연결하는 데는 흥미가 없었다.
유클리드는 그의 책 《원론(Elements)》에서 플라톤의 다면체에 대해 완벽한 수학적 기술을 해두었다. 원론의 마지막 권은 정다면체에 관한 정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권 정리 13-17은 정다면체들의 순서대로 구조를 설명한다. 각각의 정다면체들에 대해 외접원의 반지름의 비를 구해 두었다. 18번 정리에서 그는 이 5개의 정다면체 이외의 정다면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마지막 책의 많은 정보가 아마도 테아이테토스의 업적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는 당시 알려져 있던 지구 밖 5개의 행성과 플라톤의 다면체와의 관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1596년 출간된 그의 책 《Mysterium Cosmographicum》에서 케플러는 5개의 정다면체가 내접원과 외접으로 둘러싸인 태양계의 모델을 제시했다. 6개의 구들은 각각 행성들에 대응한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다면체들은 가장 안쪽에서부터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 순이다. 이런 식으로, 태양계의 구조와 행성 간의 거리 관계는 플라톤의 다면체에 의해 기술되었다. 결국에, 케플러의 초기 아이디어는 파기되었지만, 그의 연구를 통해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기보다 타원에 가까운 것임이 밝혀졌고,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물리와 천문학의 판도를 바꾸었다. 거기다 케플러의 다면체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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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면체(正多面體, 영어: Platonic solid) 또는 플라톤의 다면체는 볼록 다면체 중에서 모든 면이 합동인 정다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꼭짓점에서 만나는 면의 개수가 같은 도형을 말한다. 무수히 많이 존재할 수 있는 정다각형과는 다르게 정다면체는 아래의 5종류만이 존재한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
오로지 다섯 개의 정다면체만 존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다면체에서 최소한 세 개의 면이 있어야 하나의 꼭짓점이 만들어진다.
이때 각 꼭지각의 합은 360보다 작아야 한다.
다면체를 구성하는 면은 모두 합동이므로 각 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한편 이런 꼭지각이 최소한 세 개로 구성되므로 모든 꼭지각의 크기는 360°/3=120°보다 작아야 한다.
내각의 크기가 120°보다 작은 정다각형은 정삼각형 · 정사각형 · 정오각형뿐이다.
정삼각형: 내각의 크기가 60°이므로, 하나의 꼭짓점에 모일 수 있는 삼각형면의 개수는 3개 · 4개 · 5개이다. 이것은 각각 정사면체 · 정팔면체 · 정이십면체에 해당한다.
정사각형: 내각의 크기가 90°이므로, 하나의 꼭짓점에 모일 수 있는 사각형면의 개수는 3개이다. 이것은 정육면체에 해당한다.
정오각형: 내각의 크기가 108°이므로, 하나의 꼭짓점에 모일 수 있는 오각형면의 개수는 3개이다. 이것은 정십이면체에 해당한다.
신사임당
사임당 신 씨(師任堂申氏, 1504년 12월 5일 ~ 1551년 5월 17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입니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입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입니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입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됩니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습니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습니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입니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됩니다.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중에서 둘째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습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합니다.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먼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습니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습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습니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친정어머니 이 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 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의 원조를 받아 한성의 본가에서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 해에 몇 번 처가를 들르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편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시에 그쳤고, 기묘사화로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산 사임당의 어머니는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고 소신 있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 씨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었으나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을 탄복케 하였습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습니다. 아들 딸의 차별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습니다. 특히 신명화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합니다. 결혼 이후에는 본이름 대신 사임당, 임사재, 인임당 등의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한성부에 거주했고, 한성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7세 때는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으로부터 부덕과 소학, 대학, 가례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찍부터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칭송을 받기도 했는데, 명종조에 살던 어숙권(魚叔權)은 어린 인선의 작품을 보고 감탄, 자신의 저서 《패관 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합니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엄격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습니다. 보통 사대부가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습니다.
한편 신명화는 덕수 이 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하였습니다.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주변에서는 사윗감을 볼 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신 진사는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주어야 합니다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지체 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습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택한 인물은 이원수라는 총각이었습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은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킨 조건은 이원수가 편모슬하에서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딸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까운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 부인처럼 시집을 보내지 않고 친정 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습니다.
1522년(중종 17년) 8월 20일 형제 정승인 이기, 이행의 조카인 덕수 이 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5남 3녀를 두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입니다. 훗날 사이가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친정을 떠나 이원수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고향에 대한 향수와 친정을 떠나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들은 후일 그의 대표작으로 후대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시댁은 파주에 있었지만 결혼하던 그해 말, 친정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습니다. 한성과 친정 강릉을 오가던 생활이 많이 불편했던 그는 남편 이원수에게 특별히 한성과 강릉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는데 셋째 아들 이이는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조선 중, 후기 서인과 노론 당의 사상적인 시조였습니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관직은 정 3품에 머물렀지만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고,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 재주에 능하여 작은 신사임당,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교적인 규범을 내세웠던 조선 왕조 환경에서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모든 재능을 묻어야만 했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대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기녀임을 보면, 일반 가정의 부인이 집안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이런 사회적 제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들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임당이 예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가지 환경이 크게 좌우했습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아버지 신명화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원수는 한편으로는 부인인 사임당을 어느 정도 멀리하게 됩니다.
당대의 인물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에 비교하여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았으나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적 부인관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재능이 출중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유독 둘째 사윗감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했고, 남편인 이원수는 장인 신명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혼한 첫 해에 장인이 갑자기 죽게 되자 이원수는 어쩔 수 없이 강릉과 파주를 오가게 됐습니다.
또한 남편 이원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는 않았는데,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좋은 명산을 알아내 남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왔고, 그는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 만에 학문을 단념,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 한성부와 평창 등 각지로 이사 다녔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사임당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33세 때,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대학이 입니다.
1537년 사임당은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로 담았습니다. 이는 후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송되었습니다.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산처럼 내 고향 천리연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톺에 혜락 모이락
고깃배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친정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사임당은 38세에 한성부에 새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 씨와 함께 살았습니다. 홍 씨 부인 역시 연로하여 살림을 모두 며느리에게 맡기고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했고, 건강의 악화와 함께 남편의 축첩,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습니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자상하고 인자한 태도를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남편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겨 방을 따로 얻은 것입니다. 남편 이원수가 첩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평생 한양과 강릉을 오가면서 부인과 생활을 했지만, 주변에 여인이 있습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그의 외할아버지 이사온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남편의 외도는 신사임당에게 예기치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남편 이원수는 외도에서 끝내지 않고, 첩을 한 명 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들인 첩 권 씨는 술주정과 행패가 심하였습니다.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있지 않소?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 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시조 시인인 이은상 시인이 쓴 사임당과 율곡에서 발췌.
광해군 때에 출판된 동계만록에 적혀 있는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대화를 보면 신사임당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이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 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남편의 첩이지만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한 권 씨를 사임당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재능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을 쓸 정도였습니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이원수가 세도가인 의정부영의정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습니다고 전해집니다. 이기는 이원수의 5촌 당숙이자 시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였는데, 명종 초기에 소윤의 영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인물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1550년 가슴 통증을 앓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됩니다. 병은 심장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부인은 가난하여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 ”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습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그것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
실수로 빌려온 옷을 버렸던 그 귀부인은 치마를 팔았는데, 실물과도 같아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림과 시 재주는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어머니를 닮아 서화에 뛰어난 솜씨들을 보이며 이름을 날린 이우와 큰딸 이매창이 그들입니다. 특히 이우는 "그림의 품격이 빼어나 조화를 일찍 묵화로 풀벌레를 그려 내어 길에다 던지자 뭇 닭들이 실제 벌레인줄 알고 한꺼번에 쫓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형 이이가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습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과 시 재주가 있었습니다. 큰딸 매창 역시 시화에 능해서 '작은 신사임당'이라 불렸다.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 씨와 관계하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됩니다.
이원수가 첩 살림을 시작하자 신사임당은 반발하면서 부부관계가 냉각되고 마침내 한때 그녀가 금강산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후대의 동인과 남인들은 율곡 이이는 물론이고 사임당도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던 것은 아니냐며 이이와 그의 정당인 서인(西人)을 향한 정치공세 거리로 활용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신사임당은 자신이 죽더라도 새장가를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반발심 때문인지 이원수는 공자, 증자, 주자도 새장가를 들었습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임당이 하나하나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반박하자 이원수는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한성과 파주 율곡리와 강릉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줄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인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여자가 바로 권 씨였습니다. 그러나 권 씨는 신사임당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 사는 탕녀였습니다. 첩인 주모 권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다시 이원수에게 첩인 권 씨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원수나 사임당은 자녀들 중 특히 이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이이는 평생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딸 매창은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알아채고 글과 그림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 달라는 어린아이의 정성 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이 형제의 병구완에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신사임당은 죽기 직전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 씨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은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그가 죽자마자 첩인 권 씨를 본댁으로 들여오고, 아들 이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자리도(紫鯉圖), 노안도(蘆雁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적이며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1551년 5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 중이던 남편 이원수는 세곡 운반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파견되어 갔습니다.
1551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이이(李珥)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전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울면서 편지를 썼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임무를 마치고 자식들과 함께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임당이 편지를 보낸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일 후에는 위독해졌습니다. 그리고 병상에 둘러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신사임당은 5월 14일경 병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7일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향년 48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의 자녀들은 서모인 권 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 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참다못한 이이가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습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습니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하였습니다.
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 안장하였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습니다. 후에 이이가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까지 승진하여, 정경부인(정1품)에 추증하였습니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친정 조카인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선조입니다.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아들인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신사임당 역시 다시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현창 하고, 국사와 국어 교과서, 미술 교과서에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 여성계의 집단 반발이 거셌으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50000원 지폐 주인공으로 도안하였습니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에 의해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습니다."며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도안 당시부터 선정 이후에도 여성계와 시민단체의 반발과 비판으로 사회적인 이슈, 후유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신사임당의 50000원 지폐 도안설이 돌자 여성단체는 확정 전부터 신사임당 선정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으로 선정되자 여성계와 시민단체에서 반발과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장영실
장영실
출생 미상 (고려 경상도 동래)
사망 미상
성별 남성
본관 아산(牙山)
경력 조선 시대 과학기술자 출신의 발명가 겸 관료
부모 장성휘(부)
형제 이복 누이동생 1명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은 조선의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입니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으로 본관은 아산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습니다. 장영실은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설명합니다.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 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 경입니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 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 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 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이 천민(기생)이라서 그 신분을 이어받아 천민이었습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발명가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하여 발탁하였습니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 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습니다. 1424년(세종 6) 5월, 임금은 그를 정 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받았습니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 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습니다. 장영실은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습니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 생활을 지던 중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하였습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 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습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습니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정 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 3품관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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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품
앙부일구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입니다.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히 제작한 것입니다.
자격루
자격루(自擊漏)는 조선 세종 때의 물시계로, 자동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입니다. 장영실과 김조 등이 2년 간 제작하여 세종 16년 (1434년 8월 5일 (음력 7월 1일)) 완성·발표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중종 때 자격루가 낡으며 자격루를 새로 만들었다. 중종 때의 자격루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가 보존되어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옥루
옥루(玉漏)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 물시계의 하나입니다.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습니다.
그 외 발명품
갑인자, 규표, 일성정시의, 정남일구, 현주일구, 소간의, 흠경각, 앙부일구
세종
세종
조선 제4대 왕(1418 – 1450)
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 1450년 3월 30일)은 조선의 제4대 국왕(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입니다. 세종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불립니다.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 입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습니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읽지 못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써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습니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 등법과 연분 9 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습니다.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1](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 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 씨(원경왕후)의 여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습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입니다.
1408년(태종 8년), 충녕 군(忠寧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 씨와 혼인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습니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습니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 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습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습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 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습니다.
양녕대군과의 갈등
실록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옷을 차려입고 몸단장을 한 뒤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아랫사람에게 묻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상왕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 후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인 칠점생을 데리고 가려 하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결국 칠점생을 데려가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세자가 조모인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불쾌해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은 기생 어리(於里)를 사랑하여 여러 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에 따라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어리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원망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혼나면서 공손하지 못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말대꾸했는데 이때마다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을 타일렀습니다.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 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廣州)로 추방하였습니다. 이어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습니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습니다.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 세력을 숙청하였습니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습니다.
치세
대외 정책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四郡)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六鎭)을 설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습니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습니다.
공녀와 금은 조공 중지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사대 정책을 취하였으며 매년 조공하고 조공품보다 후한 물품들을 받았으나, 공녀 등의 인적자원과 광물의 조공은 국가 재정의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태종과 세종대에 명나라에 처녀와 금은을 조공하였습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세종 시대의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 보다 증가하였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청하여 조공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로 차출되는 공녀들은 이송 전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으며, 남겨진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습니다. 태종 · 세종대에 조선인 공녀 중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황제의 사망 후 순장되었습니다.
세종은 이복동생인 함녕군과 인순부윤 원민생등을 명에 보내어 작고 척박한 땅에서 금은이 나지 않음을 이유로 금은 조공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습니다.
고려 말부터 지속된 왜구의 노략질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적 통제에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419년(세종 1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6월 19일, 이종무를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습니다. 열흘 후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습니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1426년(세종 8년) 내이포, 부산포, 염포 등의 3포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러 정책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같은 정책으로 14세기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삼포왜란이 발생하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은 소강상태를 보였습니다.
4군 6진 개척
"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조종(祖宗)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
—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년) 8월 6일 (계해)
태종 이래 불안정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정벌 계획을 수립하였고 세종은 마침내 요동 정벌 이후 수그러들었던 북진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1432년(세종 14년), 두만강 하류의 석막을 공격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습니다.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으로 하여금 압록강과 개마고원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최윤덕이 이끄는 부대는 파저강 전투(婆猪江)에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세종은 이 일대에 여연(閭延) · 자성(慈城) · 무창(茂昌) · 우예(虞芮) 등 4개의 군(四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김종서가 이끄는 부대는 함길도 지역을 내습하는 여진족을 소탕하여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1437년(세종 19년) 이 일대에 온성(穩城)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 · 회령(會寧) · 종성(鍾城) 등의 여섯 개의 진(六鎭)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하였습니다.
이후 이 지역의 관리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토관제도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1420년(세종 2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습니다.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며,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의 글자를 창제하였습니다. 글자의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
— 《세종어제 훈민정음》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였고 예조판서 정인지가 서문을 작성하였습니다.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습니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되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일곱 가지 음(音)을 맞추었습니다.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오묘함을 모두 포괄하여 28자만으로 전환이 무궁무진하였습니다.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정밀하면서도 막히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이면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이 글자를 가지고 옛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됩니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쓰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디를 가든지 통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의 울음소리 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
재상 등용과 국정 분담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이것은 의정부서사제 시행이었습니다.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습니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습니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습니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습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습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습니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습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습니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세종은 이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습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합니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입니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는 황희가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으로부터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라고 면박당했는데 도리어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였습니다.
세종대의 또 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적으로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습니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과학의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천문 기구 겸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습니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습니다.
천문과 역법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에 명해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 등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인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외편을 편찬하였는데,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습니다.
금속활자와 인쇄술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이 시기에 밀랍 대신에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종전보다 인쇄 능률을 향상해 서적 편찬에 힘썼습니다.
도량형 통일 · 총통제작
1431년(세종 13년)과 1446년(세종 25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 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음악 정비 · 편경 제작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했다. 또한 새로운 우막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 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다.
편경은 쇠나 흙으로 만들어져 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음을 제대로 조율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으나 1430년(세종 12년), 편경을 돌로 제작하여 고른 소리를 내게 하였다. 날씨나 온도가 변해도 형태가 바뀌지 않는 돌의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서적 편찬
세종 본인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 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와 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와 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와 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와 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이 편찬되었다.
문물 정비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하고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와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 정비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1422년(세종 4년), 《속육전》의 완전한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에서는 1426년(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 책과 《등록 謄錄》 1 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1433년(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1435년(세종 17년)에 이르러 《속육전》의 편찬 사업이 완결되었다.
형옥제도 확립
그 밖에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1439년(세종 21년), 양옥(凉獄), 온옥(溫獄), 남옥(男獄), 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1448년(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 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 및 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은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이에게 자자(刺字), 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 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사형수는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도입하였는데, 사형수의 사형에 대하여 의금부에서 반드시 3심을 거쳐 결정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외에도 죄수의 자식을 부양하는 것과 유배 중의 죄수가 늙은 부모를 만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공법 제정
조선의 조세 제도는 토지와 노동력,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조용조 제도였다. 세종은 이 가운데 조세 제도의 근간인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 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여론을 조사하여 57%의 찬성을 얻어냈으나 이에 대한 반대와 문제점이 제기되자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436년(세종 18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1444년(세종 26년)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내는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매년 농사의 풍흉을 상중하로 구분하여 최대 20두에서 최소 4두까지 거두어들이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이다. 이후 공법은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애민정책
세종은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 人君之職, 愛民爲重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
— 《세종실록》 76권,
세종 9년(1427년) 12월 20일 (계유)
1437년(세종 19년), 굶주리는 백성들이 발생하자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각전과 각관에 바치는 반찬을 없앴다.
관비(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여자 종)가 출산할 경우, 1주일의 산후 휴가만 주어졌는데 출산 후 100일을 쉬도록 명을 내렸으며, 관비의 남편 또한 산후 1개월의 휴가를 주었다. 이러한 명령에 대해 당시의 일부 관료들이 비판하였지만 이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또한 노비를 가혹하게 다루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 법령에 따라 엄중히 처단할 것을 명하였다.
이 밖에도 나라의 노인들을 우대하였으며, 쌀과 의복을 내려 구휼하였고 때로는 양로연을 열어 노인들을 위로하였다. 승정원에서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 중 천민의 참석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이를 일갈하며 노인의 신분에 관계없이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모두 참석하도록 지시하였다.
불교에 귀의
유교 이념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전왕조인 고려가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쇠퇴하였음을 경계하며 억불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천년 넘게 이어져 온 불교 신앙은 민간은 물론 왕실 내에서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못했다. 세종은 때에 따라 억불 정책을 펼치면서도 왕실 내의 불사를 직접 주관하였다.
재위 후반에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자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을 이끌고 불교 사원을 찾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불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숭불 정책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건강 악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하였다.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육식을 즐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으나 노년에는 질병을 앓아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그려진 국가표준 영정이나 이당 김은호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세종이 사냥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와 소갈증(消渴症, 당뇨병), 풍질(風疾)과 성병의 일종인 임질 등을 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시각 장애를 앓아 괴로워하는 기록이 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세종은 당뇨병을 치료하기 위해 식이요법으로 흰 수탉(백웅계)을 자주 먹었다. 이는 어의에 처방에 따른 것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훗날 세조 6년 1460년에 전순의가 편찬한 당대 최고의 식이요법서 《식료찬요 食療撰要》에 당뇨병 치료법으로 소개되어 있다.
최후
치세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하여 제대로 집무할 수 없게 되자 세자 향(문종)이 대리청정하였다.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고 불교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힘을 빌렸다. 1446년(세종 26년)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2월 4일, 병세가 악화하여 영응대군의 집으로 이어 하였고 2월 17일 승하하였다.
묘호와 시호
1450년(문종 즉위년) 2월 22일, 시호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묘호를 세종(世宗)으로 세종의 세(世)는 '번성'을 의미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뜻이 담겨 있다.
3월 13일, 허후, 정인지 등이 세종의 묘호는 중흥 혹은 창업의 업적을 이룬 군주에게 올리는 것인데 선왕은 이에 어울리지 않으니 문종(文宗)으로 고칠 것을 청했으나 문종은 선왕이 북방의 공훈이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 전에 나아가서 시호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능묘
능은 영릉(英陵)으로 소헌왕후와 한 봉분 안에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위치하며 효종의 능과 함께 영녕릉(英寧陵)을 구성한다.
세종의 능은 원래 태종의 능인 헌릉 근처의 구룡산 부근이었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 1년) 경기도 여주의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때 초장지였던 구룡산의 비석과 석물은 그대로 방치하고 새롭게 조성되었다. 1981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최초로 묻혔던 능의 상석과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었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기타
일화
왕자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시력이 나빠지자, 이를 걱정한 태종이 젊은 환관을 시켜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여러 번 읽었다.
첫 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김 씨(휘빈 김 씨)는 투기와 미신행위를 이유로 폐위하였고, 두 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 씨(순빈 봉 씨)는 궁녀와의 동성애 행위가 적발되자 폐위하였다.
적자 중에는 영응대군을, 서자 중에는 계양군을 가장 사랑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왕세자(문종)와 수양대군(세조)을 불러 사람들의 이간질에 휘말리지 말고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당부하였다.
중첩된 혼인 관계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은 이들과 이중 삼중의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 씨의 작은아버지 심종은 세종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심종은 태조 이성계의 딸인 경선공주의 남편이며 세종의 장인 심온의 동생이다.
세종의 동서인 노물재의 어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이며 민제의 딸이다. 따라서 세종의 이종사촌 형제가 된다. 노물재는 심온의 셋째 딸에게 장가들어 세종의 이종사촌임과 동시에 동서가 되었으며, 노물재의 아들이 성종 때의 영의정 노사신이다.
세종의 처남인 심준은 세종의 외삼촌인 민무휼의 사위이므로, 처남인 동시에 외사촌 매제가 된다.
세종의 보양식
세종은 정실 왕비인 소헌왕후 이외에도 10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도합 11명의 처와 첩을 통하여 모두 19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얻었다. 세종의 넘치는 스태미나의 원천은 그가 평소에 즐겨 먹었던 보양식에 있었다. 세종은 평소 흰 수탉 고환 요리를 즐겨 먹었다. 이 요리는 중국에서 옛날부터 강정식품으로 먹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임산부가 수탉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손 귀한 집에서는 수탉을 찾았다. 세종의 수라상에는 항상 수탉의 고환을 벌꿀과 달걀흰자를 섞어 살짝 데친 요리가 올라왔다고 한다. [48] 당대에는 닭 자체가 귀했고, 특히 흰 수탉은 더욱 귀했기 때문에 수탉 고환요리는 민가에 전해지지 않은 채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다.
대각선
어떤 다각형의 대각선(對角線, 영어: diagonal)은 다각형에서 서로 마주 보는 두 각을 잇는 직선이고 이웃하지 않는 두 꼭짓점을 잇는 선분입니다.
어떤 다면체의 맞모금은 같은 면 위에 있지 않은 두 꼭짓점을 잇는 선분을 뜻합니다.
대각선의 개수
n각형의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는 (n-3) 개입니다. n개의 꼭짓점이 있으니 대각선은 모두 (n-3) ×n개 일듯 하지만 대각선은 두 꼭짓점에 연결되어 있어서 2번씩 샌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다각형에서 대각선의 개수는 ((n-3) ×n)÷2입니다.
예를 들면
사각형의 대각선의 개수는 ((4-3) ×4)÷2=2개입니다.
오각형의 대각선의 개수는 ((5-3) ×5)÷2=5개입니다.
육각형의 대각선의 개수는 ((6-3) ×6)÷2=9개입니다.
칠각형의 대각선의 개수는 ((7-3) ×7)÷2=14개입니다
강감찬
강감찬(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 ~ 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고 본관은 금주입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습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졌습니다. 1030년(정종 21)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입니다.
강감찬은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강감찬으로 남았습니다.
5대 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습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993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은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서희(徐熙)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요의 땅도 다 고려 땅이라고 주장,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은 물러갔고, 고려는 서희의 담판 결과로써 강동 6주를 획득하였습니다.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습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습니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습니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보고 물러갔습니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 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 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습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합니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습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습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습니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현종 사후 사망하였습니다. 고려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가 되었습니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입니다. 향년 84세.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습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1968년 충현사가 건립되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습니다.
설화로는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대첩에서 크게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티라노사우루스(라틴어: Tyrannosaurus)는 백악기 후기(6900~6500만 년 전)에 살았던 용반목 수각아목 티라노사우루스과의 속입니다. 종명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틴어: Tyrannosaurus rex)의 일반적인 약자인 티렉스(T.rex 또는 T-Rex)가 대중문화에 정착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에서 주로 서식했으며, 다른 티라노사우루스과의 공룡에 비해 그 서식 범위가 넓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악기 말에 소행성 충돌로 인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수십 평방 km에 달하는 넓은 영토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헨리 페이필드 오스번이 1905년 티라노사우르스를 명명했습니다. 속명은 그리스어 단어인 τυράννος (tyrannos, "폭군"이라는 뜻)와 σαύρος (sauros, "도마뱀"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스번은 라틴어 단어로 "왕"이라는 의미의 rex를 종명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전체 학명은 "폭군도마뱀 왕"이라는 의미가 되어 티라노사우루스의 크기와 당시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모습을 강조합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으로 밝혀진 이빨이 1874년에 콜로라도주 골든 부근의 아서 호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존 벨 해처는 와이오밍 동부에서 몸통의 일부를 찾았습니다. 이 화석들은 당시에는 대형 오르니토미무스 (O. grandis)의 일종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가 사우스다코타 서부에서 1892년에 발견하여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라고 이름 붙인 척추조각 역시 지금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학예사였던 바넘 브라운이 1900년에 와이오밍 동부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첫 골격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H. F. 오스번은 190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골격을 디나모사우루스 임페리오수스(Dynamosaurus imperiosus)로 명명했습니다. 브라운은 1902년에 몬타나의 헬 크리크 층에서 또 하나의 골격 일부를 찾아냈습니다. 오스번은 D. imperiosus를 기재한 동일 논문에서 이것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완모식 표본으로 기재하였습니다. 1906년에 오스번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티라노사우루스를 유효한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원래의 디나모사우루스 표본은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해서 브라운은 티라노사우루스의 골격 일부를 다섯 개 발견했니다. 1941년에 브라운이 1902년에 발견한 표본이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에 팔렸습니다. 브라운이 네 번째로 발견한 가장 큰 표본은 역시 헬크리크 층에서 나온 것으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골격 화석은 많이 있지만 발자국 화석은 뉴멕시코 북동부의 필몬트 스카우트 목장에서 발견된 하나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1983년에 발견되었고 1994년에 동정 및 기재가 이루어졌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로 불릴 수 있는 최초의 화석 표본은 두 개의 척추 뼈 조각으로 (하나는 사라졌습니다)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에 의해 1892년에 발견된 것입니다. 코프는 이것이 "아가타우미드"(뿔공룡류) 공룡의 뼈라고 믿었고, 척추뼈에 혈관이 있었던 흔적으로 구멍이 많은 것을 보고 "커다랗고 구멍이 많은 척추"라는 의미의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M. gigas 화석은 나중에 뿔공룡류가 아니라 수각류의 것으로 밝혀졌고, H. F. 오스번은 1917년에 이미 M. gigas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유사하다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노스폰딜루스 척추뼈가 일부분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스본은 두 속의 이름을 하나로 합치지는 않았습니다.
2000년 6월에 블랙힐 연구소에서 사우스다코타의 M. gigas 발견장소에서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을 추가로 발견하였습니다. 이 화석들은 이전에 발견된 것과 동일한 개체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골격으로 보인다. 동물의 학명을 결정하는 국제동물명명규약(International Code of Zoological Nomenclature)에 의하면,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가 먼저 명명되었으므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에 대하여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2000년 1월 1일부터 유효한 ICZN의 4 판에서 "먼저 명명된 동물이명(senior synonym or homonym)이 1899년 이후로 유효한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중에 명명된 동물이명(junior synonym or homonym)이 특정한 하나의 분류군에 대하여 유효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직전 50년 동안 최소한 25 건의 연구에서, 최소한 10 명 이상의 저자에 의해 사용되었다면", 이 경우에는 "널리 쓰이는 이름이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이 조건 하에서 유효한 이름의 자격을 갖출 것으로 보이며 공식적으로 출판된다면 새 ICZN 하에서 노 멘 프로텍툼 (보호받는 이름) 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경우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는 노 멘 오블리튬 (잊힌 이름)이 됩니다.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수 헨드릭슨은 1990년 8월 12일, 가장 완벽하고 (약 85%) 2001년까지는 가장 거대했던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화석을 사우스다코타 주의 페이스 부근 헬크리크 층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티라노사우루스는 수 헨드릭슨의 이름을 기념해 "수"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소유권을 두고 큰 법정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997년에 이 다툼은 원래의 땅 소유주인 모리스 윌리엄스에 유리하게 합의되었습니다. 화석은 경매를 통해 필드 자연사박물관에 7600만 달러에 팔려 당시 가장 비싼 공룡 골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98년에서 1999년까지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표본담당자들이 25,000 맨-아워 이상을 들여 뼈에서 암석을 제거했습니다. 골격은 뉴저지로 보내져 전시용 마운트가 제작되었습니다. 완성된 마운트를 분해해 뼈와 함께 시카고로 보냈고 최종 조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조립된 골격은 2000년 5월 17일에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스탠리홀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표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수"는 19 살에 최대 크기로 자라서 28 살에 죽었으며 이것은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중에 가장 오래 산 것입니다. 수가 머리 뒤쪽을 물려서 죽었을 것이라는 초기의 추측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연구에서 여러 병리학적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물린 자국은 없었습니다. 두개골 뒤쪽의 상처는 죽은 이후에 밟혀서 생긴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의 추측에 의하면 "수"는 고기를 먹고 기생충에 감염되어 목구멍에 염증이 생겨서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되어 굶어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가설은 두개골에 가장자리가 매끈한 구멍들이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되는데, 유사한 증상이 오늘날의 새가 같은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스탠"이라는 또 다른 티라노사우루스는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스탠 새크리슨을 기념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우스다코타주 버펄로 부근의 헬크리크 층에서 1987년 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화석은 트리케라톱스 골격으로 오인되어 1992년까지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스탠은 골격 중 62% 가 보존되어 있으며 1995년와 1996년에 세계 순회 전시를 마친 후 사우스다코타의 힐 시티에 있는 블랙힐스 지질학 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다. 이 티라노사우루스 역시 부러졌다가 회복된 갈비뼈, 부러졌다가 치유된 목뼈,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이빨이 들어갈 만큼 큰 머리 뒤쪽의 눈에 띄는 구멍 등 뼈에서 여러 병리학적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2000년 여름에 잭 호너는 몬태나의 포트 펙 저수지 부근에서 다섯 개의 티라노사우루스 골격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알려진 것 중 가장 큰 티라노사우루스일 것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2001년에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버피 자연사박물관 직원에 의해 몬태나의 헬크리크 층에서 전체 골격 중 50% 가 보존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제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화석은 처음에는 난쟁이 티라노사우리드인 나노티라누스의 첫 발견으로 간주되었으나 후속 연구에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완벽하고 잘 보존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 표본입니다. 잭 호너, 피트 라슨, 로버트 바커, 그레고리 에릭슨, 그리고 몇몇 기타 유명한 고생물학자들이 제인의 독특한 나이 때문에 이 표본을 조사했습니다. "제인"은 현재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버피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6년 4월 7일, 한 보도자료에서 몬태나 주립대학 보즈만 분교는 알려진 것 중 가장 큰 티라노사우루스 두개골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1960년대에 발견되어 최근에 복원된 이 두개골은 149.9 cm로 "수"의 두개골 크기인 140.7 cm에 비해 6.5% 큽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몸에 비해 거대한 두개골과 길고 무거운 꼬리가 균형을 이루면서 이족보행을 하는 육식동물이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뒷다리가 크고 강력한데 비해 앞다리가 매우 작았는데, 앞다리는 크기에 비해 힘이 아주 강하여 최대 150kg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수각아목의 육식공룡 중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몸길이가 길거나 키가 큰 수각류는 존재하지만 무게로 비교하면 티라노사우루스가 가장 무겁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서식지에서 가장 큰 육식공룡이었기에 최상위 포식자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먹이로는 조각류, 각룡류가 있으며, 성체가 아닌 아성체 용각류도 먹이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표본은 30여 개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뼈가 거의 대부분 보존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조직과 단백질이 이러한 표본 중 하나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비교적 많은 화석 덕분에 티라노사우루스에 대하여 생활사, 생물 역학 등 여러 측면에서의 생물학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습관이나 생리학, 주행속도 등에서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졌었습니다.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타르보사우루스, 주청티라누스를 별도의 속으로 유지할지에 대한 분류적 논란도 있었습니다. 유티라누스도 "티라누스"라는 이름이지만 티라노사우루스과분류는 아닙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백악기 후기의 끝 무렵, 랜스 동물군 시대(Lancian faunal age; 마스트리히트절에 해당)로 불리는 기간에 살았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북쪽으로는 캐나다, 남쪽으로는 텍사스와 뉴멕시코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서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이 기간 동안 서식 지역의 북쪽에는 트리케라톱스가 주된 초식동물이었고, 티타노사우리아 용각류인 알라모사우루스가 남쪽지역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은 내륙, 해변, 늪지, 그리고 반건조 내지 건조한 평원지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생태계에서 나타났습니다.
몇몇 중요한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이 헬크리크 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스트리히트절 동안 이 지역은 아열대의 따뜻하고 습한 기후였습니다. 식물군은 속씨식물 위주였으나 메타세쿼이아와 아라우카리아 같은 나무도 있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트리케라톱스와 근연 케라톱스과인 토로사우루스, 하드로 사우리드인 에드몬토사우루스, 갑옷공룡인 안킬로사우루스,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힙실로포돈류인 테스켈로사우루스, 그리고 수각류 오르니토미무스와 트로오돈 등과 같이 이 생태계에서 살았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발견되는 또 다른 층은 와이오밍의 랜스 층입니다. 이곳은 오늘날의 걸프 코스트와 비슷한 바이유 환경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곳의 동물군은 헬 크릭과 매우 비슷하지만 오르니토미무스 대신 스트루티오미무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뿔공룡류인 렙토케라톱스 역시 이곳에 살았습니다.
서식 범위의 남쪽에서 티라노사우루스는 알라모사우루스, 토로사우르스, 에드몬토사우루스, 그리고 안킬로사우루스과인 안킬로사우루스, 및 익룡인 케찰코아틀루스 등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반건조 내륙평원으로 추측되며 아마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서부내륙해가 후퇴해 생겼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티라노사우루스는 다른 용각류를 잡아먹었으나 백악기 말에 커다란 소행성이 날아와 지구와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행성의 충돌로 인해 먼지들이 햇빛을 차단해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여 말라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용각류들이 먹을 식물이 없어서 굶주려 죽어 가자 티라노사우루스도 용각류들이 없어지자 굶주려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티라노사우루스는 멸종된 육식 공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글
한글(韓㐎, 영어:Hangeul 또는 Hangul), 조선글은 한국어의 공식 문자로서, 세종이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창제한 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20세기 초반 이후 달리 이르는 명칭입니다.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선연구학회 회원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뜻은 '으뜸이 되는 큰 글', '오직 하나뿐인 큰 글', '한국인의 글자'입니다. 한글의 또 다른 별칭으로는 정음(正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가갸글, 국문(國文)등이 있다.
음소문자인 한글은 홀소리(모음)와 닿소리(자음) 모두소리틀을 본떠 만들었으며 창제된 초기에는 닿소리 17개에 홀소리 11개, 총 28개였으나, 점차 4자(ㅿ, ㆁ, ㆆ, ㆍ)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현재는 홀소리 10자, 닿소리 14자만 쓰고 있습니다. 한글은 표음문자(소리글자)이자 자질문자로서 표의문자인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글'이라 부릅니다.
한글(훈민정음)은 창제된 이후 약 500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글을 무시하고 홀대했으며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탄압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조작하는 등 한국어와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선각자가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널리 보급하려 노력하였습니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된 이래 여러 시련을 감내하며 한글 연구의 명맥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한글날 제정, 사전편찬, 맞춤법 제정 등 많은 성과를 일구어냈습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가 활동을 재개하였고 1949년에 '한글학회'로 개칭되면서 한글 표준화 사업 등 큰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국어로서의 위상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훈민정음해례본'은 기록에만 존재할 뿐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을 전형필이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지불하여 입수한 후 보관하였습니다. 광복 후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습니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체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학설들이 난무하며 독창성이 부정당했다. 그러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해례본은 전권 33장 1 책의 목판본으로 책의 규격은 가로 20cm, 세로 32.3cm이며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 부분은 세종이 직접 썼으며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로 되어 있다.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로 되어 있고 신숙주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습니다. 정인지가 대표하여 쓴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습니다.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한국어를 자신의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서 족하다 해도 한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 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취지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어는 중국 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려우며, 둘째로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로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부터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습니다.
한편 훈민정음(이하 한글) 창제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 후 통일하기 위한 책으로서, 한글을 사용하여 이 책에 수록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의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한글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송처검, 조근, 정창손과 함께 1444년 2월 20일에 연명상소(갑자상소)를 올려 한글 반포를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한글이란 시골 촌부나 사용할만한 상스러운 문자이고, 이두와는 달리 출세에만 급급한 벼슬아치들을 양산하여 학문의 발전을 쇠퇴시킬 것이고, 한글사용은 가벼운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아 정치에도 무익하고, 억울한 옥살이의 원인은 문맹(文盲)이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에 있으며, 새로운 문자사용이란 널리 의논하고 매우 신중하고 거듭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 등등의 주장을 펼치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이두와 한글의 사용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반박했고, 언어학 와 음운학을 거론하며 이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반박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최만리를 비롯한 연명상소를 올린 7명이 지속적인 반대가 극심하자 세종은 정창손을 파직시킴과 동시에 7명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가두어 버렸습니다. 하옥된 7명은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최만리는 이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였습니다. 다만 김문(金汶)은 석방된 후 곤장 100대를 맞았는데 이는 한글 반포에 대해 찬성하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반대했음에 대한 처결이었다.
정찬손이 파직된 것은 세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종은 지난 1428년에 발생하여 충격을 준 패륜범죄의 재발을 막고자,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한글을 보급한 후, 과거에 편찬했던 <삼강행실도>를 한국어로 번역, 배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계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창손은 과거에 <삼강행실도>를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었음을 거론하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실천 여부는 개인의 성품과 자질에 따른 문제이지 쉬운 문자로 쓴 책을 보급한다 하여 달라질 게 없다고 하며 한글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정창손의 발언은 유학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격노한 세종은 파직을 명했던 것이었습니다. 야비하고 상스러운 문자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반대하는 것에 화가 난 세종은 평소답지 않게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강하게 대처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경책 덕분인지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한글에 대해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으며 1446년 정식 반포 이후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과 달리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문자 개혁 정책의 추진이 널리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하옥해 가면서까지 자신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를 더욱 연구하며 한글 반포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1446년 9월에 한글이 반포되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약 3년간 실제 궁중에서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습니다.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으며 1444년 2월에 최항과 박팽년에게 의 한글 번역을 명했습니다. 반포 하기도 전에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이미 '한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으며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습니다. 목판본 10권 5 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됩니다.
한글을 반포한 후에는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고,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습니다. 사서(四書)를 한국어로 번역하게 했고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습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한글로 글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점차 퍼져나갔습니다.
1539년 중종 때 주양우(朱良佑)라는 자가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중국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을 편찬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진행했지만 세종은 한글 반포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며, 훗날 중국에 보내는 세종의 부고에도 훈민정음을 세종의 업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문자 창제란 '문화적 독립'을 의미하는데, 이는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을 무시하고 한자 중심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진행했던 것입니다.
중국(명나라)은 조선의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의 내정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1368년에 태조 주원장이 명(明)을 건국한 이래 3대 영락제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1435년에 정통제가 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점차 침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대의 충신들이 사망하고 1442년에 섭정인 성효소황후 마저 죽자 환관 왕진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1449년에 정통제가 직접 참전했다가 황제가 적국에 생포당하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통제는 생환 후 태상황이 되어 유폐된 채 지내다가 1457년에 쿠데타를 통해 복위하는 등에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으며 이후의 황제들도 치세가 그리 순탄치만은 못했습니다.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 자모 낱자의 명칭을 무엇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문서나 교재를 통해 한글을 교육할 때에는 개별 명칭이 굳이 필요 없지만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는 명칭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한 당대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자모 명칭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1527년에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입니다.
이 책은 아동들의 한자 공부를 위해 저술한 학습서인데 이 책의 말머리에 〈언문자모(諺文字母)〉란 제목 아래 한글자모에 관한 설명과 자모의 운용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한글 자모 낱자의 명칭을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달아 놓았고 자모 낱자의 순서 등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자모 낱자의 명칭은 각 글자 밑에, 기역 其役, 니은 尼隱, 디귿 池○末, 리을 梨乙, 미음 眉音, 비읍 非邑, 시옷 時○衣, 이응 異凝”, “키 ○箕, 티 治, 피 皮, 지 之, 치 齒, 而, 이 伊, 히 屎”, “아 阿, 야 也, 어 於, 여 余, 오 吾, 요 要, 우 牛, 유 由, 으 應 不用終聲, 이 伊 只用中聲, 思 不用初聲”과 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최세진이 자모 낱자의 명칭과 자모의 순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전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언급도 이 책에는 없습니다. 또한 한글 자모 낱자가 모두 27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문자 체계의 변화가 생겨서 'ㆆ(여린히읗)'에 사용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훈몽자회》에 기록된 자모 낱자 명칭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글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된 초기에는 '정음(正音)' 또는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정음'은 훈민정음을 약칭한 것이고, '언문'이란 《세종실록》에서 '상친제 언문이 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에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양반들은 한자를 제외한 한글을 ‘언문’이라 칭하며 상것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하대하였습니다. 또한 한글을 '가짜 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언서(諺書)'라고 부르며 낮추어 보았는데, 이는 한자(漢字)를 진짜 글이라는 의미의 '진서(眞書)'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반절(反切)’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중·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중·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합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반토막글'이라는 의미로 ‘반절(反切)’이라 하였습니다. '암클'이라고도 불렸는데 소수에게 불린 명칭이며 이것은 여성이 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은 아니고 한글은 남성, 여성 모두 사용했으나 '암'은 여성이라는 뜻 말고도 부족하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한 경우 쓰는 부족한 글씨 즉 '암클'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아직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아햇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승려나 중인(中人) 이하에서나 쓰는 글자라는 하대하는 뜻을 가진 '중글'은 절의 승려들이 한글로 불경을 번역하고 신도들에게 교리 교육에도 사용하였다고 해서 비롯된 말입니다. '나랏글'이라는 의미의 '국문(國文)'으로 불린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이나 일제강점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한글'이라 불리게 된 것은 1910년 경부 터입니다.
이처럼 한글이 반포된 이후 조선의 양반들은 한글 사용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한글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한자와 달리 얕잡아 보며 이류 문자 취급하면서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 사회로부터 홀대받은 한글은 주로 농서나 의서 같은 실용 서적을 번역하거나 불경을 번역, 편찬하는데 한정됐습니다. 사서삼경 언해본이 나왔지만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백성에게는 여전히 어려웠고 과거 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나 자격이 없던 평민들에게는 불필요한 책이었을 뿐입니다. 고급 정보를 담은 책은 여전히 한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글인 윤음을 한글로 펴내기도 했으나 한문 중심의 국가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바뀐 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도 한글 사용을 외면하고 100% 한문으로만 저술을 남겼습니다. 특히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조차 한문만 사용했습니다. 실학자였던 이들조차 한자보다 실용적인 한글을 외면하고 한자를 우대하는 양반 사대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양반들에 의해 우리글인 한글이 무시당하는 풍조는 19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의 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인 헐버트의 회고록에는, "조선인들은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으며 사대부들에게 한글을 아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거품을 물고 모른다고 답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그는 1889년에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를 집필하였는데, 책의 서문에 "한글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라고 썼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지배계층이 우수한 한글을 두고 여전히 한자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504년(연산군 10년) 7월에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범인 색출 작업을 했으나 잡아내지 못하자 연산군은 그해 7월 20일부로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하도록 명했습니다.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게 했고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는데, 위반자는 '기훼제서 율(棄毁制書律)'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사용하는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웃도 잡아들여서 '제 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때리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안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한글로 역서를 번역하도록 했으며, 궁인의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의녀를 시켜 읽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중기 한글이 지배 계층으로부터 멸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490년 충청도 회덕에 사는 신창 맹 씨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인인 남편 나신걸로부터 한글로 쓰인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함경도에서 한성으로 전근되었으니 옷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1586년 경상도 안동에 일선 문 씨는 세상을 먼저 떠나 남편 이응태에게 원망 섞인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는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한글로 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한문에 비해 매우 단순하여 읽고 쓰기가 너무나도 쉬웠던 까닭에 누구나 짧은 시간 내에 배우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대학》에 구결을 달고 언해한 《대학율곡언해》는 1749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창작된 문학이 유행하였고, 서간에서도 한글/정음이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약 400여 년이 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한글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입니다. 그는 19세기말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한국인 이승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 교재인 《Corean Primer》(한국어 첫걸음)을 1877년에 펴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하였습니다. 이는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배재학당 교수로 활동하던 미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에 따라 1896년에 창간된 한글판에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마침표'와 '쉼표'도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나랏글)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글 사용이 점차 늘자, 한글 표기법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공동연구에 의한 통일된 문자 체계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1905년 지석영이 상소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상에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 5월에 이능화가 〈국문일정의견〉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습니다. 1506년 중종 때 언문청이 폐지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문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 및 어윤적, 이종일, 이억, 윤돈구, 송기용, 유필근, 지석영, 이민응의 8 위원 연구 안으로 완결되었습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됩니다.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국어라는 말이 일본어를 뜻하게 되면서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1913년 3월 23일에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변경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강연, 학술대회를 연 바, 1926년에 한글날을 제정하였고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을 창간하였습니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며 학회지 ‘한글’ 창간(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말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942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어연구가 중단되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일삼았습니다. 3·1 운동 이후 유화적인 문화통치를 실시했으나 허울뿐이었으며 탄압과 감시, 민족말살과 황국식민화 교육, 우민화 정책에 따른 단순 실업 교육, 일본어 학습 확대, 한국어 교육 축소를 단행했습니다. 이런 일제의 차별 교육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무렵 문맹률은 약 70% 정도에 달하였습니다. 같은 역사를 가지고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확보하고 단결할 수 있으며 민족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인의 문맹률은 너무 높았습니다. 심각성을 깨달은 민족 지도자들은 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글 보급 운동에 나섰습니다.
언론사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931년 동아일보가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대학생으로 조직된 계몽대가 지방으로 내려가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조선일보는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아래 문맹퇴치운동을 했습니다. 조선어학회도 전국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문자보급운동이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운동으로 확대되어 가자 일제는 1934년에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했습니다. 또한 1930년대 말부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도 탄압하였습니다.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조선어학회는 초·중등 교과서 편찬(1945), 훈민정음 원본 영인 (1946),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설치(1948)하였습니다. 아울러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후 큰 사전 편찬(1957),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1962), 쉬운 말 사전(1967), 월간지 ‘한글새소식’ 창간(1972),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1984), 제1회 우리 말글 연수회(1985), 한국지명총람 편찬(1986), 문학한글 창간(1987), 한 한샘 주시경 연구/교육한글 창간(1988) 등 일했습니다.
또한,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편찬(1991), 우리말 큰사전 편찬(1991), 제1회 외국인 한국어 발표 대회(1999), 학회 발행 논문집 학술정보 제작(2000), 첫 번째 우리말 글 지킴이 위촉(2000), 우리 토박이말 사전 편찬(2001), 첫 번째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 이름 선정(2001), 제1회 전국 한말글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2004), 한글 무늬 옷 입기 운동(2005), 한글날 큰 잔치 조직위원회 결성(2006), 한글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4편(한 한샘 주시경, 외솔 최현배, 건재 정인승, 고루 이극로) 편찬(2008, 2009)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비영리 학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어 누리그물(인터넷)을 통하여 갖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 교환의 마당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 정기 간행물 『한글』,『문학한글』, 『교육한글』, 『한 한샘 연구』, 『한글 새 소식』 등을 누리집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훈민정음해례본》, 즉 간송본은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글의 옛 이름이자 해설서의 제목이기도 한 훈민정음은 해례본, 예의본, 언해본으로 구분됩니다. 이 중에 해례본만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으며 예의본과 언해본은 단행본이 아니고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려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해례본과 예의본은 한문으로 쓰여 있고 언해본은 한문과 함께 한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1946년부터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또한 9월 8일을 '세계 문해의 날(International Literacy Day)'로 지정하여 매년 기념행사하며 문맹 퇴치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문해의 날이란, 문자를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날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며, 이는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한국 정부는 문해력이 낮은 백성들을 위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과 업적을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세계 문맹 퇴치에 이바지하고자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을 유네스코에 제안하였습니다. 이런 취지에 공감하여 상을 제정한 유네스코는 1990년부터 문맹 퇴치에 앞장선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매년 세계 문해의 날에 수여하고 있습니다. 수상자에게 지급되는 상금은 한국 정부가 전액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어 한자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그 사용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의 영어 우대 정책으로 한글의 사용이 점차 줄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2009년에는 문자가 없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찌아찌아어의 표기 문자로 시범으로 한글을 채택, 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정부의 반대와 소수만 배우는 문제 등으로 인해서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 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부 주가 모어 표기 문자로 한글을 도입하였습니다.
역사
역사(歷史, 영어: history)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 중 후대에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킵니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합니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입니다.
역사의 어원은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습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습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합니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입니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냅니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집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합니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합니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대의 인류 문명사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집니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 수메르 문명
• 인더스 문명
• 요하 문명
• 황하 문명
• 이집트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
• 히타이트 문명
• 고대 그리스 문명
• 고대 로마 문명
• 페르시아 제국
• 박트리아 마르기 아나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폴리네시아 문명
• 아스텍 문명
• 잉카 문명
• 한국의 역사
역사의 시대적 구분
선사 시대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 석기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
역사 시대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 고대사 : 문자 발명(BC3000년경)~서로마제국 멸망(AD476)
• 중세사 : 서로마제국 멸망(AD476)~동로마제국 멸망(AD1453)
• 르네상스 : 14C~16C 문예부흥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
• 근세사 : 르네상스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기, 한국사에서는 조선 건국(AD1392)~18C
• 근대사 : 17C~20C
• 현대사 : 20C~현재
• 미래사
대륙별 역사
• 아프리카
• 아메리카
• 아시아
• 유럽
• 오세아니아
• 남극
지리학과의 관계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습니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합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습니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습니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습니다.
역사 서술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입니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됩니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됩니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 과거"를 참칭 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물론 하나의 집단 내부에서도 역사를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육 등을 통하여 이런 관행들이 사라질 것이라 믿기도 했으나 근대 이후 일부 고위층의 연구 결과나 현대의 우파적 학파들에서는 인간 혹은 자아를 가진 지성체의 본성이라 미래에도 계속될 일로 보는 편입니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합니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됩니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습니다. 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처럼 서로 겹치기도 합니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합니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합니다.
설날
설날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이자 설날로 기념합니다.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삼고, 한국에서 설날은 설,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이라고도 하며,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New Year’s Day. 음력 1월 1일은 Lunar New Year’s Day라 해요.
대한민국은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법정공휴일입니다. 양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신정"이며, 보통 새해 첫날, 또는 양력설이라고 부르고 음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설날"이고, 보통 설날, 구정, 음력설이라고 부릅니다. 음력설은 추석과 더불어 2대 명절 중 하나로, 이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이 고유의 풍습입니다. 한국에서는 1896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양력 1월 1일이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이지만, 음력을 썼던 전통에 따라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합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양력설인 새해 첫날을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로 여기며, ‘설’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간다’ 등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5년부터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하였고, 1989년부터 민속의 날을 '설날'로 이름을 바꾸고 설날을 3일 연휴(음력 12월 30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음력 1월 1일 음력설을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묵은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한 해의 첫날이라는 새해 첫날의 의미는 양력 1월 1일인 양력설이 더 강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
북한은 양력 1월 1일을 설날로 간주하며 중요한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67년부터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북한은 음력 1월 1일을 단지 휴식일로 간주하고, 새해의 첫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두고 있습니다.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북한에서는 설날이라 부르며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설
중국의 설 -
춘절(중국어 간체자: 春节, 农历新年, 정체자: 春節, 農曆新年, 병음: Chūnjié, Nónglì xīnnián 춘지에)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명절로써 기념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 양력설을 공식적인 새해 첫날로 간주하고 원단(元旦)이라고 부릅니다. 음력 1월 1일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국경절과 함께 가장 큰 양대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양력설인 새해 첫날에는 카운트다운 행사와 해맞이, 불꽃놀이 등의 축제가 벌어지며, 보통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음력설인 춘절에는 대규모 귀성객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등 한국의 음력설과 비슷한 모습을 보내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보통 1주일 이상을 휴일로 합니다. 중국에서 춘절은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가 강하며, 중국도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새해의 첫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둡니다.
양력설과 음력설(춘절)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도 국경일이며, 그 밖의 나라에 사는 화교들도 명절로 즐깁니다.
일본의 설 - 오쇼가쯔(正月)
양력 1월 1일이며, 설날은 일본의 연중 최대 명절입니다. 이는 서양의 설이 양력 1월 1일인 점을 그대로 답습한 메이지 유신에 따른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음력 1월 1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인들은 조니(雑煮)라고 불리는 떡국을 먹는데, 한국의 떡국과는 달리 찰떡을 사용하며, 국물도 간장국이나 된장국을 사용합니다. 또한 한 해 동안의 무사안녕을 위해 기모노를 입고 신사나 절을 참배하는데, 이를 하쓰모데라 합니다. 법으로 정해진 설 연휴는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이지만, 대부분 일본의 기업, 관공서들은 연말인 12월 29일부터 1월 3일까지 연휴입니다. 음력 1월 1일은 일본에서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평일입니다.
베트남 : 뗏(Tết, 節)
몽골 : 차강사르(Tsagaan Sar, 하얀 달)
태국 : 송끄란(สงกรานต์, Songkran)
미얀마 : 띤잔이라는 물축제
스리랑카 : අලුත් අවුරුද්ද, Aluth Avurudda
캄보디아 - បុណ្យចូលឆ្នាំថ្មី, Chaul Chnam Thmey
라오스 : ປີໃໝ່, Pii Mai
서양의 신년 맞이 축제
유럽 국가들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신년전야부터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까지를 설날로 기념하여 축제를 열고 유럽의 영향을 받은 미국 등 아메리카 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비슷합니다. 이것이 서양에 있는 나라에서는 설날 같은 것입니다.
이슬람권의 설날
음력인 이슬람력을 사용하여 이슬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하고 있습니다. 양력으로 양력 8월 중순~10월 초 사이에 오며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 사이에 흔히 오는 기념일입니다. 아랍어로는 라스 앗싸 낫 알히즈리야(رأس السنة الهجرية, Ras as-Sanah al-Hijriyah)이라고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슬람의 설날입니다.
센텀 신세계 카페 키츠네
카페 키츠네

부산 해운대구 우동 1495 신세계 백화점 센텀 시티점 5층에 위치한 카페 키츠네는 프랑스 브랜드 메종
오픈 첫날 가봤습니다.
이날의 일정은 정말 돌고 돌고
걷고 또 걸어서 힘들었지만
마지막까지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준 커피숍
오픈 행사였는지 사진도 찍을 수 있어
함께 갔던 지인과 사진도 찍고
여우 모양의 로고가 인상적인 곳입니다. 매장 내부는 화이트와 우드 톤으로 꾸며져
있으며,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그니처 메뉴인 여우 쿠키는 귀여운 모양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여우 쿠키를 보며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때 샀어야 했어... ㅠㅠ
카페 키츠네는 쇼핑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더욱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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