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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출생 미상 (고려 경상도 동래)
사망 미상
성별 남성
본관 아산(牙山)
경력 조선 시대 과학기술자 출신의 발명가 겸 관료
부모 장성휘(부)
형제 이복 누이동생 1명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은 조선의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입니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으로 본관은 아산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습니다. 장영실은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설명합니다.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 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 경입니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 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 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 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이 천민(기생)이라서 그 신분을 이어받아 천민이었습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발명가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하여 발탁하였습니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 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습니다. 1424년(세종 6) 5월, 임금은 그를 정 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받았습니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 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습니다. 장영실은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습니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 생활을 지던 중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하였습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 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습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습니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정 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 3품관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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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품
앙부일구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입니다.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히 제작한 것입니다.

자격루
자격루(自擊漏)는 조선 세종 때의 물시계로, 자동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입니다. 장영실과 김조 등이 2년 간 제작하여 세종 16년 (1434년 8월 5일 (음력 7월 1일)) 완성·발표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중종 때 자격루가 낡으며 자격루를 새로 만들었다. 중종 때의 자격루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가 보존되어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옥루
옥루(玉漏)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 물시계의 하나입니다.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습니다.

그 외 발명품
갑인자, 규표, 일성정시의, 정남일구, 현주일구, 소간의, 흠경각, 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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