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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 씨(師任堂申氏, 1504년 12월 5일 ~ 1551년 5월 17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입니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입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입니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입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됩니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습니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습니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입니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됩니다.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중에서 둘째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습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합니다.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먼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습니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습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습니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친정어머니 이 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 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의 원조를 받아 한성의 본가에서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 해에 몇 번 처가를 들르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편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시에 그쳤고, 기묘사화로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산 사임당의 어머니는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고 소신 있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 씨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었으나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을 탄복케 하였습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습니다. 아들 딸의 차별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습니다. 특히 신명화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합니다. 결혼 이후에는 본이름 대신 사임당, 임사재, 인임당 등의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한성부에 거주했고, 한성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7세 때는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으로부터 부덕과 소학, 대학, 가례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찍부터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칭송을 받기도 했는데, 명종조에 살던 어숙권(魚叔權)은 어린 인선의 작품을 보고 감탄, 자신의 저서 《패관 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합니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엄격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습니다. 보통 사대부가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습니다.
 
한편 신명화는 덕수 이 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하였습니다.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주변에서는 사윗감을 볼 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신 진사는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주어야 합니다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지체 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습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택한 인물은 이원수라는 총각이었습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은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킨 조건은 이원수가 편모슬하에서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딸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까운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 부인처럼 시집을 보내지 않고 친정 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습니다.
 
1522년(중종 17년) 8월 20일 형제 정승인 이기, 이행의 조카인 덕수 이 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5남 3녀를 두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입니다. 훗날 사이가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친정을 떠나 이원수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고향에 대한 향수와 친정을 떠나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들은 후일 그의 대표작으로 후대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시댁은 파주에 있었지만 결혼하던 그해 말, 친정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습니다. 한성과 친정 강릉을 오가던 생활이 많이 불편했던 그는 남편 이원수에게 특별히 한성과 강릉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는데 셋째 아들 이이는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조선 중, 후기 서인과 노론 당의 사상적인 시조였습니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관직은 정 3품에 머물렀지만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고,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 재주에 능하여 작은 신사임당,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교적인 규범을 내세웠던 조선 왕조 환경에서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모든 재능을 묻어야만 했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대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기녀임을 보면, 일반 가정의 부인이 집안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이런 사회적 제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들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임당이 예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가지 환경이 크게 좌우했습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아버지 신명화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원수는 한편으로는 부인인 사임당을 어느 정도 멀리하게 됩니다.
 
당대의 인물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에 비교하여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았으나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적 부인관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재능이 출중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유독 둘째 사윗감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했고, 남편인 이원수는 장인 신명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혼한 첫 해에 장인이 갑자기 죽게 되자 이원수는 어쩔 수 없이 강릉과 파주를 오가게 됐습니다.
 
또한 남편 이원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는 않았는데,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좋은 명산을 알아내 남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왔고, 그는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 만에 학문을 단념,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 한성부와 평창 등 각지로 이사 다녔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사임당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33세 때,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대학이 입니다.
 
1537년 사임당은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로 담았습니다. 이는 후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송되었습니다.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산처럼 내 고향 천리연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톺에 혜락 모이락
 
고깃배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친정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사임당은 38세에 한성부에 새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 씨와 함께 살았습니다. 홍 씨 부인 역시 연로하여 살림을 모두 며느리에게 맡기고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했고, 건강의 악화와 함께 남편의 축첩,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습니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자상하고 인자한 태도를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남편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겨 방을 따로 얻은 것입니다. 남편 이원수가 첩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평생 한양과 강릉을 오가면서 부인과 생활을 했지만, 주변에 여인이 있습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그의 외할아버지 이사온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남편의 외도는 신사임당에게 예기치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남편 이원수는 외도에서 끝내지 않고, 첩을 한 명 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들인 첩 권 씨는 술주정과 행패가 심하였습니다.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있지 않소?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 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시조 시인인 이은상 시인이 쓴 사임당과 율곡에서 발췌.
 
광해군 때에 출판된 동계만록에 적혀 있는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대화를 보면 신사임당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이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 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남편의 첩이지만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한 권 씨를 사임당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재능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을 쓸 정도였습니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이원수가 세도가인 의정부영의정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습니다고 전해집니다. 이기는 이원수의 5촌 당숙이자 시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였는데, 명종 초기에 소윤의 영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인물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1550년 가슴 통증을 앓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됩니다. 병은 심장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부인은 가난하여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 ”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습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그것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
실수로 빌려온 옷을 버렸던 그 귀부인은 치마를 팔았는데, 실물과도 같아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림과 시 재주는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어머니를 닮아 서화에 뛰어난 솜씨들을 보이며 이름을 날린 이우와 큰딸 이매창이 그들입니다. 특히 이우는 "그림의 품격이 빼어나 조화를 일찍 묵화로 풀벌레를 그려 내어 길에다 던지자 뭇 닭들이 실제 벌레인줄 알고 한꺼번에 쫓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형 이이가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습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과 시 재주가 있었습니다. 큰딸 매창 역시 시화에 능해서 '작은 신사임당'이라 불렸다.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 씨와 관계하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됩니다.
 
이원수가 첩 살림을 시작하자 신사임당은 반발하면서 부부관계가 냉각되고 마침내 한때 그녀가 금강산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후대의 동인과 남인들은 율곡 이이는 물론이고 사임당도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던 것은 아니냐며 이이와 그의 정당인 서인(西人)을 향한 정치공세 거리로 활용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신사임당은 자신이 죽더라도 새장가를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반발심 때문인지 이원수는 공자, 증자, 주자도 새장가를 들었습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임당이 하나하나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반박하자 이원수는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한성과 파주 율곡리와 강릉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줄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인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여자가 바로 권 씨였습니다. 그러나 권 씨는 신사임당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 사는 탕녀였습니다. 첩인 주모 권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다시 이원수에게 첩인 권 씨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원수나 사임당은 자녀들 중 특히 이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이이는 평생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딸 매창은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알아채고 글과 그림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 달라는 어린아이의 정성 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이 형제의 병구완에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신사임당은 죽기 직전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 씨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은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그가 죽자마자 첩인 권 씨를 본댁으로 들여오고, 아들 이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자리도(紫鯉圖), 노안도(蘆雁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적이며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1551년 5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 중이던 남편 이원수는 세곡 운반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파견되어 갔습니다.
 
1551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이이(李珥)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전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울면서 편지를 썼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임무를 마치고 자식들과 함께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임당이 편지를 보낸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일 후에는 위독해졌습니다. 그리고 병상에 둘러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신사임당은 5월 14일경 병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7일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향년 48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의 자녀들은 서모인 권 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 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참다못한 이이가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습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습니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하였습니다.
 
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 안장하였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습니다. 후에 이이가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까지 승진하여, 정경부인(정1품)에 추증하였습니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친정 조카인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선조입니다.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아들인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신사임당 역시 다시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현창 하고, 국사와 국어 교과서, 미술 교과서에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 여성계의 집단 반발이 거셌으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50000원 지폐 주인공으로 도안하였습니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에 의해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습니다."며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도안 당시부터 선정 이후에도 여성계와 시민단체의 반발과 비판으로 사회적인 이슈, 후유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신사임당의 50000원 지폐 도안설이 돌자 여성단체는 확정 전부터 신사임당 선정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으로 선정되자 여성계와 시민단체에서 반발과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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