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 ~ 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고 본관은 금주입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습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졌습니다. 1030년(정종 21)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입니다.
강감찬은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강감찬으로 남았습니다.
5대 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습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993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은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서희(徐熙)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요의 땅도 다 고려 땅이라고 주장,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은 물러갔고, 고려는 서희의 담판 결과로써 강동 6주를 획득하였습니다.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습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습니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습니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보고 물러갔습니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 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 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습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합니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습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습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습니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현종 사후 사망하였습니다. 고려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가 되었습니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입니다. 향년 84세.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습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1968년 충현사가 건립되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습니다.
설화로는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대첩에서 크게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공부
강감찬
티라노사우루스
티라노사우루스(라틴어: Tyrannosaurus)는 백악기 후기(6900~6500만 년 전)에 살았던 용반목 수각아목 티라노사우루스과의 속입니다. 종명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틴어: Tyrannosaurus rex)의 일반적인 약자인 티렉스(T.rex 또는 T-Rex)가 대중문화에 정착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에서 주로 서식했으며, 다른 티라노사우루스과의 공룡에 비해 그 서식 범위가 넓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악기 말에 소행성 충돌로 인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수십 평방 km에 달하는 넓은 영토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헨리 페이필드 오스번이 1905년 티라노사우르스를 명명했습니다. 속명은 그리스어 단어인 τυράννος (tyrannos, "폭군"이라는 뜻)와 σαύρος (sauros, "도마뱀"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스번은 라틴어 단어로 "왕"이라는 의미의 rex를 종명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전체 학명은 "폭군도마뱀 왕"이라는 의미가 되어 티라노사우루스의 크기와 당시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모습을 강조합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으로 밝혀진 이빨이 1874년에 콜로라도주 골든 부근의 아서 호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존 벨 해처는 와이오밍 동부에서 몸통의 일부를 찾았습니다. 이 화석들은 당시에는 대형 오르니토미무스 (O. grandis)의 일종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가 사우스다코타 서부에서 1892년에 발견하여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라고 이름 붙인 척추조각 역시 지금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학예사였던 바넘 브라운이 1900년에 와이오밍 동부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첫 골격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H. F. 오스번은 190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골격을 디나모사우루스 임페리오수스(Dynamosaurus imperiosus)로 명명했습니다. 브라운은 1902년에 몬타나의 헬 크리크 층에서 또 하나의 골격 일부를 찾아냈습니다. 오스번은 D. imperiosus를 기재한 동일 논문에서 이것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완모식 표본으로 기재하였습니다. 1906년에 오스번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티라노사우루스를 유효한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원래의 디나모사우루스 표본은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해서 브라운은 티라노사우루스의 골격 일부를 다섯 개 발견했니다. 1941년에 브라운이 1902년에 발견한 표본이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에 팔렸습니다. 브라운이 네 번째로 발견한 가장 큰 표본은 역시 헬크리크 층에서 나온 것으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골격 화석은 많이 있지만 발자국 화석은 뉴멕시코 북동부의 필몬트 스카우트 목장에서 발견된 하나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1983년에 발견되었고 1994년에 동정 및 기재가 이루어졌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로 불릴 수 있는 최초의 화석 표본은 두 개의 척추 뼈 조각으로 (하나는 사라졌습니다)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에 의해 1892년에 발견된 것입니다. 코프는 이것이 "아가타우미드"(뿔공룡류) 공룡의 뼈라고 믿었고, 척추뼈에 혈관이 있었던 흔적으로 구멍이 많은 것을 보고 "커다랗고 구멍이 많은 척추"라는 의미의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M. gigas 화석은 나중에 뿔공룡류가 아니라 수각류의 것으로 밝혀졌고, H. F. 오스번은 1917년에 이미 M. gigas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유사하다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노스폰딜루스 척추뼈가 일부분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스본은 두 속의 이름을 하나로 합치지는 않았습니다.
2000년 6월에 블랙힐 연구소에서 사우스다코타의 M. gigas 발견장소에서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을 추가로 발견하였습니다. 이 화석들은 이전에 발견된 것과 동일한 개체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골격으로 보인다. 동물의 학명을 결정하는 국제동물명명규약(International Code of Zoological Nomenclature)에 의하면,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가 먼저 명명되었으므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에 대하여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2000년 1월 1일부터 유효한 ICZN의 4 판에서 "먼저 명명된 동물이명(senior synonym or homonym)이 1899년 이후로 유효한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중에 명명된 동물이명(junior synonym or homonym)이 특정한 하나의 분류군에 대하여 유효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직전 50년 동안 최소한 25 건의 연구에서, 최소한 10 명 이상의 저자에 의해 사용되었다면", 이 경우에는 "널리 쓰이는 이름이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이 조건 하에서 유효한 이름의 자격을 갖출 것으로 보이며 공식적으로 출판된다면 새 ICZN 하에서 노 멘 프로텍툼 (보호받는 이름) 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경우 마노스폰딜루스 기가스는 노 멘 오블리튬 (잊힌 이름)이 됩니다.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수 헨드릭슨은 1990년 8월 12일, 가장 완벽하고 (약 85%) 2001년까지는 가장 거대했던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화석을 사우스다코타 주의 페이스 부근 헬크리크 층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티라노사우루스는 수 헨드릭슨의 이름을 기념해 "수"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소유권을 두고 큰 법정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997년에 이 다툼은 원래의 땅 소유주인 모리스 윌리엄스에 유리하게 합의되었습니다. 화석은 경매를 통해 필드 자연사박물관에 7600만 달러에 팔려 당시 가장 비싼 공룡 골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98년에서 1999년까지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표본담당자들이 25,000 맨-아워 이상을 들여 뼈에서 암석을 제거했습니다. 골격은 뉴저지로 보내져 전시용 마운트가 제작되었습니다. 완성된 마운트를 분해해 뼈와 함께 시카고로 보냈고 최종 조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조립된 골격은 2000년 5월 17일에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스탠리홀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표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수"는 19 살에 최대 크기로 자라서 28 살에 죽었으며 이것은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중에 가장 오래 산 것입니다. 수가 머리 뒤쪽을 물려서 죽었을 것이라는 초기의 추측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연구에서 여러 병리학적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물린 자국은 없었습니다. 두개골 뒤쪽의 상처는 죽은 이후에 밟혀서 생긴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의 추측에 의하면 "수"는 고기를 먹고 기생충에 감염되어 목구멍에 염증이 생겨서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되어 굶어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가설은 두개골에 가장자리가 매끈한 구멍들이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되는데, 유사한 증상이 오늘날의 새가 같은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스탠"이라는 또 다른 티라노사우루스는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스탠 새크리슨을 기념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우스다코타주 버펄로 부근의 헬크리크 층에서 1987년 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화석은 트리케라톱스 골격으로 오인되어 1992년까지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스탠은 골격 중 62% 가 보존되어 있으며 1995년와 1996년에 세계 순회 전시를 마친 후 사우스다코타의 힐 시티에 있는 블랙힐스 지질학 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다. 이 티라노사우루스 역시 부러졌다가 회복된 갈비뼈, 부러졌다가 치유된 목뼈,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이빨이 들어갈 만큼 큰 머리 뒤쪽의 눈에 띄는 구멍 등 뼈에서 여러 병리학적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2000년 여름에 잭 호너는 몬태나의 포트 펙 저수지 부근에서 다섯 개의 티라노사우루스 골격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알려진 것 중 가장 큰 티라노사우루스일 것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2001년에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버피 자연사박물관 직원에 의해 몬태나의 헬크리크 층에서 전체 골격 중 50% 가 보존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제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화석은 처음에는 난쟁이 티라노사우리드인 나노티라누스의 첫 발견으로 간주되었으나 후속 연구에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완벽하고 잘 보존된 어린 티라노사우루스 표본입니다. 잭 호너, 피트 라슨, 로버트 바커, 그레고리 에릭슨, 그리고 몇몇 기타 유명한 고생물학자들이 제인의 독특한 나이 때문에 이 표본을 조사했습니다. "제인"은 현재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버피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6년 4월 7일, 한 보도자료에서 몬태나 주립대학 보즈만 분교는 알려진 것 중 가장 큰 티라노사우루스 두개골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1960년대에 발견되어 최근에 복원된 이 두개골은 149.9 cm로 "수"의 두개골 크기인 140.7 cm에 비해 6.5% 큽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몸에 비해 거대한 두개골과 길고 무거운 꼬리가 균형을 이루면서 이족보행을 하는 육식동물이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뒷다리가 크고 강력한데 비해 앞다리가 매우 작았는데, 앞다리는 크기에 비해 힘이 아주 강하여 최대 150kg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수각아목의 육식공룡 중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몸길이가 길거나 키가 큰 수각류는 존재하지만 무게로 비교하면 티라노사우루스가 가장 무겁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서식지에서 가장 큰 육식공룡이었기에 최상위 포식자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먹이로는 조각류, 각룡류가 있으며, 성체가 아닌 아성체 용각류도 먹이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표본은 30여 개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뼈가 거의 대부분 보존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조직과 단백질이 이러한 표본 중 하나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비교적 많은 화석 덕분에 티라노사우루스에 대하여 생활사, 생물 역학 등 여러 측면에서의 생물학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습관이나 생리학, 주행속도 등에서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졌었습니다.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타르보사우루스, 주청티라누스를 별도의 속으로 유지할지에 대한 분류적 논란도 있었습니다. 유티라누스도 "티라누스"라는 이름이지만 티라노사우루스과분류는 아닙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백악기 후기의 끝 무렵, 랜스 동물군 시대(Lancian faunal age; 마스트리히트절에 해당)로 불리는 기간에 살았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북쪽으로는 캐나다, 남쪽으로는 텍사스와 뉴멕시코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서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이 기간 동안 서식 지역의 북쪽에는 트리케라톱스가 주된 초식동물이었고, 티타노사우리아 용각류인 알라모사우루스가 남쪽지역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은 내륙, 해변, 늪지, 그리고 반건조 내지 건조한 평원지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생태계에서 나타났습니다.
몇몇 중요한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이 헬크리크 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스트리히트절 동안 이 지역은 아열대의 따뜻하고 습한 기후였습니다. 식물군은 속씨식물 위주였으나 메타세쿼이아와 아라우카리아 같은 나무도 있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트리케라톱스와 근연 케라톱스과인 토로사우루스, 하드로 사우리드인 에드몬토사우루스, 갑옷공룡인 안킬로사우루스,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힙실로포돈류인 테스켈로사우루스, 그리고 수각류 오르니토미무스와 트로오돈 등과 같이 이 생태계에서 살았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발견되는 또 다른 층은 와이오밍의 랜스 층입니다. 이곳은 오늘날의 걸프 코스트와 비슷한 바이유 환경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곳의 동물군은 헬 크릭과 매우 비슷하지만 오르니토미무스 대신 스트루티오미무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뿔공룡류인 렙토케라톱스 역시 이곳에 살았습니다.
서식 범위의 남쪽에서 티라노사우루스는 알라모사우루스, 토로사우르스, 에드몬토사우루스, 그리고 안킬로사우루스과인 안킬로사우루스, 및 익룡인 케찰코아틀루스 등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반건조 내륙평원으로 추측되며 아마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서부내륙해가 후퇴해 생겼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티라노사우루스는 다른 용각류를 잡아먹었으나 백악기 말에 커다란 소행성이 날아와 지구와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행성의 충돌로 인해 먼지들이 햇빛을 차단해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여 말라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용각류들이 먹을 식물이 없어서 굶주려 죽어 가자 티라노사우루스도 용각류들이 없어지자 굶주려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티라노사우루스는 멸종된 육식 공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글
한글(韓㐎, 영어:Hangeul 또는 Hangul), 조선글은 한국어의 공식 문자로서, 세종이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창제한 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20세기 초반 이후 달리 이르는 명칭입니다.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선연구학회 회원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뜻은 '으뜸이 되는 큰 글', '오직 하나뿐인 큰 글', '한국인의 글자'입니다. 한글의 또 다른 별칭으로는 정음(正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가갸글, 국문(國文)등이 있다.
음소문자인 한글은 홀소리(모음)와 닿소리(자음) 모두소리틀을 본떠 만들었으며 창제된 초기에는 닿소리 17개에 홀소리 11개, 총 28개였으나, 점차 4자(ㅿ, ㆁ, ㆆ, ㆍ)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현재는 홀소리 10자, 닿소리 14자만 쓰고 있습니다. 한글은 표음문자(소리글자)이자 자질문자로서 표의문자인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글'이라 부릅니다.
한글(훈민정음)은 창제된 이후 약 500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글을 무시하고 홀대했으며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탄압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조작하는 등 한국어와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선각자가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널리 보급하려 노력하였습니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된 이래 여러 시련을 감내하며 한글 연구의 명맥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한글날 제정, 사전편찬, 맞춤법 제정 등 많은 성과를 일구어냈습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가 활동을 재개하였고 1949년에 '한글학회'로 개칭되면서 한글 표준화 사업 등 큰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국어로서의 위상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훈민정음해례본'은 기록에만 존재할 뿐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을 전형필이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지불하여 입수한 후 보관하였습니다. 광복 후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습니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체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학설들이 난무하며 독창성이 부정당했다. 그러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해례본은 전권 33장 1 책의 목판본으로 책의 규격은 가로 20cm, 세로 32.3cm이며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 부분은 세종이 직접 썼으며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로 되어 있다.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로 되어 있고 신숙주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습니다. 정인지가 대표하여 쓴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습니다.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한국어를 자신의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서 족하다 해도 한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 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취지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어는 중국 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려우며, 둘째로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로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부터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습니다.
한편 훈민정음(이하 한글) 창제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 후 통일하기 위한 책으로서, 한글을 사용하여 이 책에 수록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의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한글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송처검, 조근, 정창손과 함께 1444년 2월 20일에 연명상소(갑자상소)를 올려 한글 반포를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한글이란 시골 촌부나 사용할만한 상스러운 문자이고, 이두와는 달리 출세에만 급급한 벼슬아치들을 양산하여 학문의 발전을 쇠퇴시킬 것이고, 한글사용은 가벼운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아 정치에도 무익하고, 억울한 옥살이의 원인은 문맹(文盲)이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에 있으며, 새로운 문자사용이란 널리 의논하고 매우 신중하고 거듭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 등등의 주장을 펼치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이두와 한글의 사용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반박했고, 언어학 와 음운학을 거론하며 이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반박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최만리를 비롯한 연명상소를 올린 7명이 지속적인 반대가 극심하자 세종은 정창손을 파직시킴과 동시에 7명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가두어 버렸습니다. 하옥된 7명은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최만리는 이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였습니다. 다만 김문(金汶)은 석방된 후 곤장 100대를 맞았는데 이는 한글 반포에 대해 찬성하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반대했음에 대한 처결이었다.
정찬손이 파직된 것은 세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종은 지난 1428년에 발생하여 충격을 준 패륜범죄의 재발을 막고자,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한글을 보급한 후, 과거에 편찬했던 <삼강행실도>를 한국어로 번역, 배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계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창손은 과거에 <삼강행실도>를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었음을 거론하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실천 여부는 개인의 성품과 자질에 따른 문제이지 쉬운 문자로 쓴 책을 보급한다 하여 달라질 게 없다고 하며 한글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정창손의 발언은 유학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격노한 세종은 파직을 명했던 것이었습니다. 야비하고 상스러운 문자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반대하는 것에 화가 난 세종은 평소답지 않게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강하게 대처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경책 덕분인지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한글에 대해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으며 1446년 정식 반포 이후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과 달리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문자 개혁 정책의 추진이 널리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하옥해 가면서까지 자신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를 더욱 연구하며 한글 반포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1446년 9월에 한글이 반포되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약 3년간 실제 궁중에서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습니다.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으며 1444년 2월에 최항과 박팽년에게 의 한글 번역을 명했습니다. 반포 하기도 전에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이미 '한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으며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습니다. 목판본 10권 5 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됩니다.
한글을 반포한 후에는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고,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습니다. 사서(四書)를 한국어로 번역하게 했고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습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한글로 글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점차 퍼져나갔습니다.
1539년 중종 때 주양우(朱良佑)라는 자가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중국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을 편찬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진행했지만 세종은 한글 반포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며, 훗날 중국에 보내는 세종의 부고에도 훈민정음을 세종의 업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문자 창제란 '문화적 독립'을 의미하는데, 이는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을 무시하고 한자 중심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진행했던 것입니다.
중국(명나라)은 조선의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의 내정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1368년에 태조 주원장이 명(明)을 건국한 이래 3대 영락제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1435년에 정통제가 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점차 침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대의 충신들이 사망하고 1442년에 섭정인 성효소황후 마저 죽자 환관 왕진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1449년에 정통제가 직접 참전했다가 황제가 적국에 생포당하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통제는 생환 후 태상황이 되어 유폐된 채 지내다가 1457년에 쿠데타를 통해 복위하는 등에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으며 이후의 황제들도 치세가 그리 순탄치만은 못했습니다.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 자모 낱자의 명칭을 무엇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문서나 교재를 통해 한글을 교육할 때에는 개별 명칭이 굳이 필요 없지만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는 명칭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한 당대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자모 명칭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1527년에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입니다.
이 책은 아동들의 한자 공부를 위해 저술한 학습서인데 이 책의 말머리에 〈언문자모(諺文字母)〉란 제목 아래 한글자모에 관한 설명과 자모의 운용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한글 자모 낱자의 명칭을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달아 놓았고 자모 낱자의 순서 등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자모 낱자의 명칭은 각 글자 밑에, 기역 其役, 니은 尼隱, 디귿 池○末, 리을 梨乙, 미음 眉音, 비읍 非邑, 시옷 時○衣, 이응 異凝”, “키 ○箕, 티 治, 피 皮, 지 之, 치 齒, 而, 이 伊, 히 屎”, “아 阿, 야 也, 어 於, 여 余, 오 吾, 요 要, 우 牛, 유 由, 으 應 不用終聲, 이 伊 只用中聲, 思 不用初聲”과 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최세진이 자모 낱자의 명칭과 자모의 순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전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언급도 이 책에는 없습니다. 또한 한글 자모 낱자가 모두 27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문자 체계의 변화가 생겨서 'ㆆ(여린히읗)'에 사용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훈몽자회》에 기록된 자모 낱자 명칭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글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된 초기에는 '정음(正音)' 또는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정음'은 훈민정음을 약칭한 것이고, '언문'이란 《세종실록》에서 '상친제 언문이 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에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양반들은 한자를 제외한 한글을 ‘언문’이라 칭하며 상것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하대하였습니다. 또한 한글을 '가짜 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언서(諺書)'라고 부르며 낮추어 보았는데, 이는 한자(漢字)를 진짜 글이라는 의미의 '진서(眞書)'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반절(反切)’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중·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중·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합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반토막글'이라는 의미로 ‘반절(反切)’이라 하였습니다. '암클'이라고도 불렸는데 소수에게 불린 명칭이며 이것은 여성이 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은 아니고 한글은 남성, 여성 모두 사용했으나 '암'은 여성이라는 뜻 말고도 부족하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한 경우 쓰는 부족한 글씨 즉 '암클'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아직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아햇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승려나 중인(中人) 이하에서나 쓰는 글자라는 하대하는 뜻을 가진 '중글'은 절의 승려들이 한글로 불경을 번역하고 신도들에게 교리 교육에도 사용하였다고 해서 비롯된 말입니다. '나랏글'이라는 의미의 '국문(國文)'으로 불린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이나 일제강점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한글'이라 불리게 된 것은 1910년 경부 터입니다.
이처럼 한글이 반포된 이후 조선의 양반들은 한글 사용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한글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한자와 달리 얕잡아 보며 이류 문자 취급하면서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 사회로부터 홀대받은 한글은 주로 농서나 의서 같은 실용 서적을 번역하거나 불경을 번역, 편찬하는데 한정됐습니다. 사서삼경 언해본이 나왔지만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백성에게는 여전히 어려웠고 과거 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나 자격이 없던 평민들에게는 불필요한 책이었을 뿐입니다. 고급 정보를 담은 책은 여전히 한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글인 윤음을 한글로 펴내기도 했으나 한문 중심의 국가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바뀐 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도 한글 사용을 외면하고 100% 한문으로만 저술을 남겼습니다. 특히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조차 한문만 사용했습니다. 실학자였던 이들조차 한자보다 실용적인 한글을 외면하고 한자를 우대하는 양반 사대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양반들에 의해 우리글인 한글이 무시당하는 풍조는 19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의 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인 헐버트의 회고록에는, "조선인들은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으며 사대부들에게 한글을 아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거품을 물고 모른다고 답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그는 1889년에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를 집필하였는데, 책의 서문에 "한글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라고 썼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지배계층이 우수한 한글을 두고 여전히 한자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504년(연산군 10년) 7월에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범인 색출 작업을 했으나 잡아내지 못하자 연산군은 그해 7월 20일부로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하도록 명했습니다.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게 했고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는데, 위반자는 '기훼제서 율(棄毁制書律)'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사용하는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웃도 잡아들여서 '제 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때리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안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한글로 역서를 번역하도록 했으며, 궁인의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의녀를 시켜 읽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중기 한글이 지배 계층으로부터 멸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490년 충청도 회덕에 사는 신창 맹 씨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인인 남편 나신걸로부터 한글로 쓰인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함경도에서 한성으로 전근되었으니 옷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1586년 경상도 안동에 일선 문 씨는 세상을 먼저 떠나 남편 이응태에게 원망 섞인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는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한글로 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한문에 비해 매우 단순하여 읽고 쓰기가 너무나도 쉬웠던 까닭에 누구나 짧은 시간 내에 배우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대학》에 구결을 달고 언해한 《대학율곡언해》는 1749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창작된 문학이 유행하였고, 서간에서도 한글/정음이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약 400여 년이 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한글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입니다. 그는 19세기말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한국인 이승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 교재인 《Corean Primer》(한국어 첫걸음)을 1877년에 펴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하였습니다. 이는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배재학당 교수로 활동하던 미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에 따라 1896년에 창간된 한글판에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마침표'와 '쉼표'도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나랏글)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글 사용이 점차 늘자, 한글 표기법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공동연구에 의한 통일된 문자 체계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1905년 지석영이 상소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상에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 5월에 이능화가 〈국문일정의견〉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습니다. 1506년 중종 때 언문청이 폐지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문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 및 어윤적, 이종일, 이억, 윤돈구, 송기용, 유필근, 지석영, 이민응의 8 위원 연구 안으로 완결되었습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됩니다.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국어라는 말이 일본어를 뜻하게 되면서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1913년 3월 23일에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변경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강연, 학술대회를 연 바, 1926년에 한글날을 제정하였고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을 창간하였습니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며 학회지 ‘한글’ 창간(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말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942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어연구가 중단되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일삼았습니다. 3·1 운동 이후 유화적인 문화통치를 실시했으나 허울뿐이었으며 탄압과 감시, 민족말살과 황국식민화 교육, 우민화 정책에 따른 단순 실업 교육, 일본어 학습 확대, 한국어 교육 축소를 단행했습니다. 이런 일제의 차별 교육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무렵 문맹률은 약 70% 정도에 달하였습니다. 같은 역사를 가지고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확보하고 단결할 수 있으며 민족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인의 문맹률은 너무 높았습니다. 심각성을 깨달은 민족 지도자들은 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글 보급 운동에 나섰습니다.
언론사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931년 동아일보가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대학생으로 조직된 계몽대가 지방으로 내려가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조선일보는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아래 문맹퇴치운동을 했습니다. 조선어학회도 전국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문자보급운동이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운동으로 확대되어 가자 일제는 1934년에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했습니다. 또한 1930년대 말부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도 탄압하였습니다.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조선어학회는 초·중등 교과서 편찬(1945), 훈민정음 원본 영인 (1946),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설치(1948)하였습니다. 아울러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후 큰 사전 편찬(1957),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1962), 쉬운 말 사전(1967), 월간지 ‘한글새소식’ 창간(1972),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1984), 제1회 우리 말글 연수회(1985), 한국지명총람 편찬(1986), 문학한글 창간(1987), 한 한샘 주시경 연구/교육한글 창간(1988) 등 일했습니다.
또한,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편찬(1991), 우리말 큰사전 편찬(1991), 제1회 외국인 한국어 발표 대회(1999), 학회 발행 논문집 학술정보 제작(2000), 첫 번째 우리말 글 지킴이 위촉(2000), 우리 토박이말 사전 편찬(2001), 첫 번째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 이름 선정(2001), 제1회 전국 한말글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2004), 한글 무늬 옷 입기 운동(2005), 한글날 큰 잔치 조직위원회 결성(2006), 한글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4편(한 한샘 주시경, 외솔 최현배, 건재 정인승, 고루 이극로) 편찬(2008, 2009)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비영리 학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어 누리그물(인터넷)을 통하여 갖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 교환의 마당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 정기 간행물 『한글』,『문학한글』, 『교육한글』, 『한 한샘 연구』, 『한글 새 소식』 등을 누리집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훈민정음해례본》, 즉 간송본은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글의 옛 이름이자 해설서의 제목이기도 한 훈민정음은 해례본, 예의본, 언해본으로 구분됩니다. 이 중에 해례본만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으며 예의본과 언해본은 단행본이 아니고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려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해례본과 예의본은 한문으로 쓰여 있고 언해본은 한문과 함께 한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1946년부터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또한 9월 8일을 '세계 문해의 날(International Literacy Day)'로 지정하여 매년 기념행사하며 문맹 퇴치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문해의 날이란, 문자를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날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며, 이는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한국 정부는 문해력이 낮은 백성들을 위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과 업적을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세계 문맹 퇴치에 이바지하고자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을 유네스코에 제안하였습니다. 이런 취지에 공감하여 상을 제정한 유네스코는 1990년부터 문맹 퇴치에 앞장선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매년 세계 문해의 날에 수여하고 있습니다. 수상자에게 지급되는 상금은 한국 정부가 전액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어 한자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그 사용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의 영어 우대 정책으로 한글의 사용이 점차 줄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2009년에는 문자가 없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찌아찌아어의 표기 문자로 시범으로 한글을 채택, 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정부의 반대와 소수만 배우는 문제 등으로 인해서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 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부 주가 모어 표기 문자로 한글을 도입하였습니다.
역사
역사(歷史, 영어: history)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 중 후대에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킵니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합니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입니다.
역사의 어원은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습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습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합니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입니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냅니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집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합니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합니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대의 인류 문명사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집니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 수메르 문명
• 인더스 문명
• 요하 문명
• 황하 문명
• 이집트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
• 히타이트 문명
• 고대 그리스 문명
• 고대 로마 문명
• 페르시아 제국
• 박트리아 마르기 아나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폴리네시아 문명
• 아스텍 문명
• 잉카 문명
• 한국의 역사
역사의 시대적 구분
선사 시대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 석기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
역사 시대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 고대사 : 문자 발명(BC3000년경)~서로마제국 멸망(AD476)
• 중세사 : 서로마제국 멸망(AD476)~동로마제국 멸망(AD1453)
• 르네상스 : 14C~16C 문예부흥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
• 근세사 : 르네상스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기, 한국사에서는 조선 건국(AD1392)~18C
• 근대사 : 17C~20C
• 현대사 : 20C~현재
• 미래사
대륙별 역사
• 아프리카
• 아메리카
• 아시아
• 유럽
• 오세아니아
• 남극
지리학과의 관계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습니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합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습니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습니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습니다.
역사 서술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입니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됩니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됩니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 과거"를 참칭 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물론 하나의 집단 내부에서도 역사를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육 등을 통하여 이런 관행들이 사라질 것이라 믿기도 했으나 근대 이후 일부 고위층의 연구 결과나 현대의 우파적 학파들에서는 인간 혹은 자아를 가진 지성체의 본성이라 미래에도 계속될 일로 보는 편입니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합니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됩니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습니다. 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처럼 서로 겹치기도 합니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합니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합니다.
설날
설날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이자 설날로 기념합니다.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삼고, 한국에서 설날은 설,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이라고도 하며,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New Year’s Day. 음력 1월 1일은 Lunar New Year’s Day라 해요.
대한민국은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법정공휴일입니다. 양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신정"이며, 보통 새해 첫날, 또는 양력설이라고 부르고 음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설날"이고, 보통 설날, 구정, 음력설이라고 부릅니다. 음력설은 추석과 더불어 2대 명절 중 하나로, 이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이 고유의 풍습입니다. 한국에서는 1896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양력 1월 1일이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이지만, 음력을 썼던 전통에 따라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합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양력설인 새해 첫날을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로 여기며, ‘설’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간다’ 등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5년부터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하였고, 1989년부터 민속의 날을 '설날'로 이름을 바꾸고 설날을 3일 연휴(음력 12월 30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음력 1월 1일 음력설을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묵은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한 해의 첫날이라는 새해 첫날의 의미는 양력 1월 1일인 양력설이 더 강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
북한은 양력 1월 1일을 설날로 간주하며 중요한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67년부터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북한은 음력 1월 1일을 단지 휴식일로 간주하고, 새해의 첫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두고 있습니다.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북한에서는 설날이라 부르며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설
중국의 설 -
춘절(중국어 간체자: 春节, 农历新年, 정체자: 春節, 農曆新年, 병음: Chūnjié, Nónglì xīnnián 춘지에)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명절로써 기념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 양력설을 공식적인 새해 첫날로 간주하고 원단(元旦)이라고 부릅니다. 음력 1월 1일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국경절과 함께 가장 큰 양대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양력설인 새해 첫날에는 카운트다운 행사와 해맞이, 불꽃놀이 등의 축제가 벌어지며, 보통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음력설인 춘절에는 대규모 귀성객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등 한국의 음력설과 비슷한 모습을 보내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보통 1주일 이상을 휴일로 합니다. 중국에서 춘절은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가 강하며, 중국도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새해의 첫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둡니다.
양력설과 음력설(춘절)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도 국경일이며, 그 밖의 나라에 사는 화교들도 명절로 즐깁니다.
일본의 설 - 오쇼가쯔(正月)
양력 1월 1일이며, 설날은 일본의 연중 최대 명절입니다. 이는 서양의 설이 양력 1월 1일인 점을 그대로 답습한 메이지 유신에 따른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음력 1월 1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인들은 조니(雑煮)라고 불리는 떡국을 먹는데, 한국의 떡국과는 달리 찰떡을 사용하며, 국물도 간장국이나 된장국을 사용합니다. 또한 한 해 동안의 무사안녕을 위해 기모노를 입고 신사나 절을 참배하는데, 이를 하쓰모데라 합니다. 법으로 정해진 설 연휴는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이지만, 대부분 일본의 기업, 관공서들은 연말인 12월 29일부터 1월 3일까지 연휴입니다. 음력 1월 1일은 일본에서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평일입니다.
베트남 : 뗏(Tết, 節)
몽골 : 차강사르(Tsagaan Sar, 하얀 달)
태국 : 송끄란(สงกรานต์, Songkran)
미얀마 : 띤잔이라는 물축제
스리랑카 : අලුත් අවුරුද්ද, Aluth Avurudda
캄보디아 - បុណ្យចូលឆ្នាំថ្មី, Chaul Chnam Thmey
라오스 : ປີໃໝ່, Pii Mai
서양의 신년 맞이 축제
유럽 국가들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신년전야부터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까지를 설날로 기념하여 축제를 열고 유럽의 영향을 받은 미국 등 아메리카 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비슷합니다. 이것이 서양에 있는 나라에서는 설날 같은 것입니다.
이슬람권의 설날
음력인 이슬람력을 사용하여 이슬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하고 있습니다. 양력으로 양력 8월 중순~10월 초 사이에 오며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 사이에 흔히 오는 기념일입니다. 아랍어로는 라스 앗싸 낫 알히즈리야(رأس السنة الهجرية, Ras as-Sanah al-Hijriyah)이라고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슬람의 설날입니다.